금호아시아나그룹의 아름다운 경...

2008년 말 나는 12년이라는 긴 시간을 근무하고 금호아시아나그룹 고문직을 사직했다.

내가 금호그룹 고문으로 가기 6개월 전에 황인성 전 국무총리가 고문으로 영입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황인성 고문은 교통부 장관을 했고, 그 관할에 항공국이 있었으니 아시아나항공으로서는 많은 자문을 얻을 수 있었다.

영입 당시 황 전 국무총리가 사양을 하는 바람에 박성용, 정구 형제가 삼고초려까지 해서 영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2005년 황인성 고문이 스스로 물러났다. 사전에 나하고 상의도 하지 않고, 이미 결정을 한 뒤에 “하는 일도 별로 없이……, 그만 두어야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니 혼자 그만두시겠다면 어떡합니까?”라고 하니 “이 장관은 젊으니까 더 있으세요”라며 사직을 했고, 결국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사실 황인성 고문이 그만두었을 때 나도 박삼구 회장한테 사의표명을 했다.

“회사에 도움을 주는 일도 없고, 괜히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형님도 안 계시고…… 회사 어른으로서 역할을 더 해주셔야 합니다.”

당시 금호그룹은 새 본사건물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박삼구 회장은 “새 본관이 3년 후면 완공이 되니까, 그때까지 만이라도 근무를 해 달라”고 했다. 결국 나는 3년 더 있다가, 2008년 12월 말일 부로 사직했다.

내가 고문으로 간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때는 박성용 회장한테 승계 받은 정구 회장이 5, 6년 경영을 이끌다가 2002년 별세한 직후였다. 하루는 박 명예회장이 나에게 “셋째인 삼구회장이 승계를 해야 하는데, 빨리 맡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고 상의를 해왔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맡는 것이 좋다. 격변하는 시대에 그 중요한 자리를 오랫동안 공석으로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아, 그런데 삼구 회장이 천천히 맡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떡해야 할지……?”

“금호 같은 대기업에서 회장직을 오래 비워두면 내부적으로야 각 계열사 사장이 책임지고 해나갈 수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문제가 많으니, 빨리 맡으라고 채근을 해야 합니다.”

▲ 2011년 금호미술괌에서 열린 필자의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 박삼구 회장, 김용환 전 재무장관, 이수휴 전 재무차관과

그 후 박 명예회장, 삼구 회장, 나, 셋이 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박 명예회장이 삼구 회장에게 “빨리 회장을 맡지 않고 뭐하느냐”며 나무라는 식으로 재촉을 했다. 그러자 삼구 회장이 “참, 형님도 뭐가 그렇게 급하십니까! 정구 형님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삼구 회장은 고(故) 정구 회장에 대한 예의와 가족의 법도가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1년여 회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다가 그 후에 승계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정도로 금호가의 형제들은 서로 밀어주고, 양보하는 우애의 전통이 있었다.

박성용 명예회장은 남덕우 총리, 최종현 회장과 함께 내 인생에 빼 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의미를 지닌 우정과 신뢰를 나눈 분이다. 나는 한 삶을 살며 이 분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금호아시아나그룹 고문직에서 물러난 후 나는 <한일협력위원회>와 <한국선진화포럼>, 그리고 <전경련원로자문위원> 모임 정도만 조용히 나가고 있다.

2002년에는 제7대 <재경인천향우회장>에 추대되어 2009년까지 재임했다. 정계은퇴 이후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일체의 공직을 피해왔는데, 전석환(全石煥) 인천고 후배들을 비롯한 향우회 임원들의 강력한 권유도 있었고, 고향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향우회장 직을 맡았다.

인천향우회는 호남이나 영남지역의 향우회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수도 서울에 인접해 있는 지정학적 여건도 그렇지만 인천토박이가 전체 시민의 10%가 채 안 된다. 호남, 충남, 이북출신이 각 30%를 차지한다. 따라서 그만큼 정치적 응집력이 떨어지지만, 인천이 동북아의 물류중심지로 발전할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출향인사들이 이를 적극 지원할 수 있도록 결속력을 강화해 나간다면 내 고향 인천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2011년 3월, 나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다름 아닌 제17대 <대한민국 헌정회(大韓民國憲政會)> 회장으로 당선된 양정규(梁正圭) 씨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헌정회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아무 직책 없이 조용히 여생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나보다는 젊은 사람이 하는 것이 좋겠다”며 완곡히 사양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양 회장의 청 또한 간곡했다. 결국 나는 임기 2년의 헌정회 정책위 의장을 맡았다. 사람의 앞날에 대해 확언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헌정회 정책위 의장은 내 마지막 공적 활동이자 직책이 될 것이다. 그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나도 이제 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