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라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사건이 나의 머리를 홍두깨 모양 강타하였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우리나라는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온갖 생각과 감회가 머리와 가슴을 오가며 압박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의 한 장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앞으로 어떤 막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운명의 힘, 인간 개인의 힘을 초월하는 운명의 결정적인 힘을 통감하였다.
1979년 12월 17일~21일 쿠바 하바나(Havana)에서 UNIDO(국제연합 공업개발지구) 주최로 77그룹 각료회의가 개최되어 하바나에 갔다. 리셉션에서 카스트로(Fidel Castro) 대통령과 인사를 나눴는데 의전장이 나를 대한민국 대표라고 소개하자 그는 “안녕하십니까. 환영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였다.
회의 기간 중 쿠바 정부의 상공부 대외무역 담당관과 면담을 하였는데, 그가 쿠바산(産) 사탕 30만 톤을 수입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정부에 보고하여 검토케 하겠다고 대답했다.
쿠바는 공산주의 독재체제하에서 미국의 금수(禁輸) 조치 등으로 경제가 매우 어려워 보였으며 주산물인 사탕의 수출에 큰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듯하였다. 해안을 시찰하면서 보니 흰쌀 떡가루 같은 고운 모래사장이 한 20여 리 가량 연속해 있고 그 모래사장 뒤쪽으로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어서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쿠바가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하여 미국 등 외부 세계에 개방되면 관광객과 휴가 여행자만으로도 쿠바 경제를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쿠바 사탕 구매 건은 정부에 보고하였으나 한국내의 정치 과도기로 인한 행정 무력증 때문에 아무런 반응없이 망각되어 버렸다.
1980년 1월 23일~26일 에콰도르(Ecuador)를 방문하였다. 수도 키토(Quito)는 해발 2,800미터 고지에 있는 도시로, 심장이 약한 사람은 호흡 곤란을 느낄 수도 있는 곳이다. 이 나라가 북한과 관계를 맺을 조짐이 있으니 가서 막으라는 임무를 띠고 간 것이었다. 나는 외무장관과 만나 한반도 사정을 이야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신중히 다루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돌아왔다.
1980년 4월 22일, 주 보스톤 함태혁(咸泰爀) 총영사의 알선으로 하버드(Harvard) 대학 국제관계연구소(Center for International Affairs)에서 <한국과 제3세계> 라는 제목으로 학술 강연을 하였다. 또한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로타리 클럽(Rotary Club, East Stroudsburg)에서도 연설을 하였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는 제3세계와 한국의 관계를 해명하고 한국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제3세계에 대한 외교에 있어서, 종전과 같이 UN 총회에서의 지지표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근시적이고 무계획한 방식보다는 상대국가의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에게 진실로 이익이 되고 그 효과가 지속되며 점차 확대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나는 본부에 <한국소재 유엔 개발기술훈련원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한국소재 유엔 개발기술훈련원 설치 건의서]
(주(駐)유엔 대사 건의 ’79.5.25.)
Ⅰ. 설치 의의
1. 남북(南北) 빈(貧)‧부국(富國) 격차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이른바 신국제경제질서수립문제(新國際秩序樹立問題)가 제6차(1974년), 제7차(1975년) 유엔 특별총회를 거쳐 국제사회의 최우선 주요과제의 하나로 등장함에 따라 1980년에 개최될 새로운 유엔 특별총회에서 채택할 예정인 신국제경제질서수립 구현을 위한 제3차 유엔 개발년도(開發年度)(’81~’90)의 신국제개발전략 기초과정에서 개도국간의 협력강화 개념이 크게 부각(浮刻)되고 있음.
2. 1975년 3월 UNIDO 2차 총회는 세계 공업생산고에 있어 개도국(120여개국)은 약 7%를 점(占)하고 있음에 유의, 2,000년대까지 그 비율을 25%로 증가할 것을 리마선언에서 요구하였음. 1978년 현재 세계 공업생산고에 있어 개도국은 9%를 상회하는 비율을 점유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동(同) 개도국 공업 총생산의 70% 이상이 한국을 비롯한 수 개 선발 개도국에 의하여 달성되고 있는 실정이며 여타 개도국의 공업생산 비율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어 개도국간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음이 지적됨.
따라서 선진개도국이 적극적인 협력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개도국간의 협력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음.
3. 북괴는 ’75년 단독 비동맹 회원국으로 가입된 이후, 비동맹회의를 외교 기반으로 하여 남북한 대결에 임하고 있으며, 특히 ’78년 이래로 비동맹회의에서 다수 온건파의 여론에 동조하면서 비동맹 조정위원국으로 입후보하는 등 비동맹 내부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는 행태 등으로 미루어 보아 앞으로 평양에 비동맹 정상회담을 유치하기 위해 획책할 것으로도 예상됨.
이러한 북괴의 비동맹 전략을 상쇄하면서 나아가 현재 아국(我國)이 국제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모범적 경제개발 모형의 평판과 산업기술 분야에서 개도국과 선진국간의 교량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야국의 위치를 이용하여 폐쇄된 북괴 경제체제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유엔제도를 통한 개방적 산업기술협력을 제공함으로써 아국에 대한 세계적 여론과 기대에 상응하는 국제적 역할을 수행함.
Ⅱ. 설치 방안
1. 명칭(가칭) : 유엔 개발기술훈련원
(UN Institute of Technical Training for Development)
2. 기금
가. 한국 정부의 기여금
― 금액 500만 불 내지 1,000만 불
― 기간 3년~1년
나. 유엔 기구 및 타국 정부의 기여금 유치
3. 설치 장소 : 한국
4. 강령 및 목적
가. 한(韓) ‧ 유엔 합작 또는 한국 주도, 유엔 협조 형태의 사업
나. 한국의 개발 경험 활용
다. 한국 산업시설에서 실지 훈련(on the job training)
라. 경제개발 기술의 전 분야(농수산 포함) 협력
마. 경제개발계획 수립 분야 협력
5. 협력 대상 : 개도국 중 중진국 이하에 속하는 국가
6. 기존시설 활용
― 과학기술연구소
― 농촌진흥청
― 수산연구소
― 보건원
등 우선 기존시설 활용, 추후 종합 훈련원 설치
7. 발표 시기
1979. 8. 20~31 비엔나 UNCSTD 회담에서 동(同) 훈련원 설치에 대한 아국 입장 천명
Ⅲ. 효 과
1. 비동맹 저개발국과의 정치외교를 경제적 측면에서 뒷받침함.
2. 대(對)개도국 경제자원외교, 수출 진흥, 기업 진출에 유리한 기반을 조성함.
3. 대(對)유엔 외교에 있어서 한국의 지위와 영향력을 증대해 가는 하나의 기반을 구축함.
4. 비동맹 제국을 통한 북괴의 책동을 중화하고 남북 간 국제적 대결에서 아국이 유리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함.
5. 현재 아국이 실시하고 있는 저개도국 기술훈련을 통합, 아국의 외교정책 수행에 있어 효과적 수단으로 사용하게 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