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2월 8일인가, 부산에서 대형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D그룹 부산 제2공장의 화재였다.
다음날 나에게 화재 사건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다. 보세공장의 사고는 세무국장에게, 보세장치장이나 보세건설장의 사고는 감시국장에게 보고되는 경로에 따라 나에게 보고된 것이었다.
나는 이 보고서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 때 불타 버린 주 품목이 인견사였는데, 인견사는 보통 나무궤짝 하나에 약 100파운드(4.5kg)로 포장된 채로 유통된다. 그런데 불탔다는 인견사의 분량이 인견사를 보관하고 있는 공장의 용적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게 아닌가? 사실 나는 K씨를 만났거나 얼굴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크고 작은 밀수 사건의 뒤에서 항상 그 회사에 대한 혐의점이 잡히곤 했던 때였기 때문에 경계는 하고 있었다.
나는 이 화재 사건에 대한 의혹을 풀기 위해 관계 과장들과 협의를 한 후, 청장에게 즉시 ‘조사단 파견’을 품의했다. 내가 청장실을 방문하여 조사단 파견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청장은 "송 국장, 그 서류 거기 두고 가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보통 때 같으면 그냥 결재를 했을 것이었다. 나는 의아했지만, 일단 서류를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며칠을 두고 몇 번이나 그 건에 대해 건의했지만 도무지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2월 17일인가, 당시 밀수합동수사반의 부반장이었던 K모 검사가 점심을 하자는 연락을 보내 왔다. 그는 내가 충무출장소에 있던 시절에 동고동락을 했던 대검 안경렬 부반장의 후임이었던 사람으로, 비교적 업무를 깨끗하게 처리하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니만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약속 장소로 갔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서니 그분 옆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는 둘만의 약속인 줄 알았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자리에 앉자, "젊은 사람 일하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열심히 하는데 하면서 K검사는 옆에 있는 사람을 나에게 소개했다.
그 사람은 "K입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몸은 아끼지 않고 뛰고 있습니다. 잘 좀 봐주셔야겠습니다" 하며 내 앞에서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난감했지만, 식사를 하면서 나는 내 원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비교적 경청하는 편이었고, 때로 자신을 변명할 때는 적극적이었다. ‘쉬운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정말 쓰디쓴 점심시간이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K씨를 만난 4~5일 뒤인 연초에 전국 세관장회의가 있었다. 청장의 훈시가 끝난 후, 청장이 갑자기 나를 찾았다. "송 국장, 나 좀 봅시다." 청장실로 함께 간 나에게 청장은 "서울세관장을 맡아 주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나는 서울세관장으로 옮기게 되었고, 내 관할을 떠난 부산 대우공장 화재사건은 조사도 하지 못한 채 영구미해결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도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만일 그때 그 화재사건이 올바르게 밝혀졌다면, 어쩌면 한 아까운 인재를 미리 구할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서울세관장 시절에도 나는 이 사건의 추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화재사건 이후 D그룹의 성장세는 문자 그대로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그것은 화재사건으로 그들이 받았던 엄청난 수혜 덕이었다고 지금도 나는 믿고 있다.
첫째, 화재사건이 일어났던 1973년은 D그룹이 창립된 지 5년째 되는 해로, 면세처리해 주었던 각종 내국세· 소비세· 물품세· 고율의 관세 등의 조세징수 시효 만료의 해가 된다. 당시에는 수출 장려 차원에서 수출용 원자재에 대해서는 5년 기한으로 면세 혜택을 주었다. 그 많은 각종 세금은 화재사건으로 인해 면탈(免脫)이 되었다.
둘째, 내가 그토록 의혹을 가졌던 인견사의 화재 소실량이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보험회사는 그들이 주장했던 소실량을 인정하여 보험금을 내어준 모양이다. 35억 원으로 기억된다.
그들은 수령한 보험금으로 서울역 앞에 있는, 당시 화재로 인해 흉하게 일그러진 교통센터 건물을 13억 원인가 하는 아주 헐값에 매입했다. 그곳이 지금의 D그룹 건물 자리다. 그들은 연이어 그 뒤에 자리 잡고 있는 S빌딩도 6억인가 7억인가 하는 비용으로 사들였다.
그 다음으로 그들이 한 일은 국유재산을 헐값에 매입하는 일이었다. 먼저 일제시대의 인천 기계제작소로, 당시에는 한국기계란 이름의 회사로 있었는데 이를 불하받았다. 이것은 D중공업의 전신이 된다. 그 후 대기업·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흡수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1973년 11월 ‘수출의 날’에는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금탑산업훈장까지 받고 대통령의 치하까지 받았다. 나의 심정은 착잡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D그룹의 K씨가 승승장구한 것은, 그의 부친이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은사인 관계로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긴 그 시절에 정계 실력자들과의 유착이 없었으면 어떻게 기업을 이루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것이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면, 나는 지금도 한 인간으로서의 K씨에 대한 연민을 버릴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시대가 그를 이용하고는 용도폐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참다운 기업가 정신이 배양될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되어 있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시대만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업가도 한 시대의 구성원으로 응당 그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덧붙여, 최근 D그룹이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면서 그 막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인생에는 반드시 사필귀정이라는 원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과연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나는가? 아니, 어쩌면 끝이 나야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