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나는 금융기관에 대해 내 입장을 정리할 수 있는 한 사건을 겪었다.
1968년, 서울에 처음 집을 구입할 때였다. 당시 구입하려던 집은 대지 25평, 건평 12평의 일본식 가옥이었다. 취득 가격이 290만 원이었는데 내 수중에는 전세금과 적금을 합하여 약 140만 원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부분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상담을 했는데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재무부 이재국(理財局) 은행과 사무관 민(閔)모 씨에게 이 사정을 말했더니, 모 시중은행에 전화를 해주었다. 그 후로 대출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나는 차질 없이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은행거래, 특히 대출을 받을 때 왜 꼭 아는 사람을 통해야 수월하고 빠르게 진행되는가? 그 사람이 그 동안 은행에 쌓아 놓은 신용은 왜 무시되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금융기관의 높은 문턱을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의 문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비록 3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금융기관을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금융기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도 그것이었다. 나는 그와 같은 금융기관의 마인드를 완전히 바꾸고 싶었다.
이 시절에 나의 중심 화두는 '고객'이었다. 금융기관은 무엇보다 고객취향 위주로 모든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으며, 부임 후의 일성이기도 했다. 오늘날은 모든 기업들이 고객만족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조차도 낯 설은 개념이었다.
1980년 7월말, 나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국민은행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신용보증기금에 대한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제1선 금융기관인 국민은행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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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단행된 나를 비롯한 은핸장 인사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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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비로소 정식 금융기관에 등단하는 기분이었다. 우선, 국민은행은 내가 몸담고 있던 신용보증기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덩치가 큰 금융기관이었다. 내가 부임할 때만 해도 한국·산업·기업·주택은행과 같은 국책은행으로서 서민금융 전담 은행이었다.
국민은행은 일제시대의 사설 계(契)조직이었던 무진회사(無盡會社)를 근간으로 발족되었으며, 5·16 쿠데타 후 주체세력에 의해 서민금융 전담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태동했다. 부임 당시 국민은행은 후발 은행으로서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던 중이었다.
서민금융을 지향하는 국민은행은 그로 인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은행만이 가지고 있던 서민용 대출상품인 상호부금(相互賦金) 제도는 서민들에게 파고드는 데 있어서 훌륭한 무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축은행으로서의 성격이 너무 강해 다양한 상품 개발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예를 들면 외국환(外國換) 업무는 기구만 갖추고 있었지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었는데, 앞으로 전개될 본격적인 금융경쟁 시대에 비추어 봤을 때는 큰 약점이었다.
한편, 국민은행 직원들의 일에 대한 무서운 집착력과 응집력은 그 기관의 큰 자산이었다. 나는 이한 국민은행의 기질 위에 다양한 금융상품의 개발이 뒤따르고 고급화된 마케팅 전략이 세워진다면 무서운 기세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1980년 7월 31일, 은행장 부임과 동시에 곧바로 업무 브리핑을 받았다. 나는 브리핑에서부터 철저한 야전의식을 심어 주기로 했다. 업무 브리핑이라면 보통 본부 업무의 총괄부서인 종합기획부로부터 받는 것이 선례(先例)였지만, 나는 이것을 무시하고 현업부서(現業部署)를 대표하는 영업부 업무보고부터 받기 시작했다. 브리핑을 받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고객 본위가 아니라 은행 본위로 업무가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나는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고객 본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국민은행에서는 그야말로 폭풍처럼 일을 몰아갔다. 부임 즉시 ‘업무개선 특별위원회’를 가동시켰다. 업무개선 특별위원회에서는 ‘왜 이런 제도가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은행의 모든 업무를 대입시켰다. 그 결과, 불필요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제도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이때 개선안으로 540여 가지가 도출되었는데, 이것을 165개로 축약하여 전면 개선했다. 출근부·근무일지 등이 이때에 없어진 것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