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곽용연이란 친구와 함께 곽 군과 친분이 있던 어떤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다른 집보다는 밥을 많이 주나 항상 배가 고팠다. 곽 군은 원래 나보다도 체구가 적기도 하나 위장이 나쁘다하며 밥을 남기는 수가 많았다. 그것은 물론 내차지였다. 그러나 항상 내 뱃속은 허기져 있어 불만이었다.
일요일과 같이 시간이 나면 청주시내 군납 육류 가공공장 인가의 옆에 선지국을 파는 집이 있어 거기에 가면 모처럼 선지로 포식을 할 수가 있었다. 그 후 사정이 있어 다른 집으로 옮겨 하숙을 하게 되었다. 이 집은 배급쌀만으로 밥을 해주는 지 아니면 조금 더 주인이 더 차지하는지 밥주발에서 한참 밑으로 들어간 양의 밥이 매끼 나왔다.
큰일이다. 배고픈 정도가 아니고 매일 나오던 변도 나오지 않는다. 약 3, 4일이 지나 변을 보게 되었는데, 잘 나오지 않아 세게 힘을 썼더니 항문이 아프게 변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이다. 이것으로 치질에 걸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어찌할 도리가 있겠는가. 예의 선지집에 가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갈수 없지 않은가. 다행히 학기가 얼마 남지 않아 졸업을 하게 되니 다행이었다.
여기도 영동과 마찬가지고 실습을 많이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는 어느 학교나 노동봉사를 일정기간 하기 마련이므로 이 학교에서는 멀리 영동군 황윤면에 가서 그때 한창 경부선을 복선으로 만드는데, 그 흙을 메워서 철도가 지나가는 둑을 만들게 되었다.
일행이 많으므로 그 행차, 숙식이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우리집 근처에 왔으니 영동에 있는 학부형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 어려운 식량사정에도 떡을 비롯하여 음식을 장만하여 한턱 써야했다. 전시이므로 여기서도 무슨 전승기념일, 무슨 일본의 국경일에는 학생동원이 많아 청주에 있는 청주사범학교, 청주중학교, 청주상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가행진 등에 참가하는 수가 빈번하였다.
학교에서 학과 과목은 영동에서 이미 배운 것이 많으므로 성적은 본바닥의 항생들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떨어지지가 않다. 이럭저럭 1년이 지나 졸업을 하게 되었다.
농예화학과에 가다
1945년 3월 20일 청주공립농업학교 농업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군이 오키나와에서 전멸당하고 미군이 일본 본토와 한반도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 이전부터 전국적으로 누구나 축구, 정구, 야구 등의 구기는 못하게 일절 금지되어 있었고 각 학교에서는 일본군 장교가 배속되어 학생들은 미군이 상륙할 때 써먹기 위하여 검도와 총검술만을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게 되니 학생 중에도 초단이 몇 명 있을 정도였다.
농업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상급학교로 그 당시에는 전문학교에 가야 하는데 농업학교를 나왔으니, 갈 곳이라고는 수원농림전문학교와 대구농업전문학교 그리고 그 전 해에 생긴 소위 사범전문학교라 하여 서울, 평양, 대구의 세 학교에 있었는데, 여기에 들어가게 되면 일본군에 안갈 뿐 아니라 졸업하면 1종 교사인가가 되기도 하고 수년만 지나면 소학교 교장이 되는 것이다.
그 당시는 학교 선생이 우수하고 존경받는 시대라 누구나 전문학교를 동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 입대를 빼준다는 것으로 닥쳐올 전쟁의 격전장에 끌려가지 않아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혜택인가? 그리고 그 당시의 인문계 전문학교(현재의 고대, 연대 등의 전신)은 입학하더라도 그 다음 해에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게 되어 있으니 누가 진학을 하겠는가.
수원 농림전문학교에서도 여러 학과 중 수의 축산과와 농업토목과만이 군 입대가 연기되고 대구농업전문학교는 농예화학과만이 징집이 연기되며 그 학교에 있는 농학과는 수원의 여러 다른 과와 같이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으니 다른 과에 진학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며 그 당시 단지 4각모를 한번 써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 국민의 가정 형편이나 각 개인의 학업성적 등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으며 청주농업학교에서는 그해 농업과, 임업과 각각 약 50명 수의축산과에서 약 30명이 졸업하게 되었는데, 임업과를 졸업한 한세환 군(6.25때 작고함)이 수원 농림학교 임학과로, 농업과 졸업생으로 박노옥 군(충북대학교 교수였다가 퇴임)이 수원의 농업전문학교에 가고 나는 대구의 농예학과에 시험을 치게 되었다.
필자는 원래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서 10살 때 영동으로 이사를 갔으나, 한 번도 경제 및 기타 사정으로 고향에 가 볼 수가 없어 항상 남쪽이 그리웠으므로 대구가 좋았다.
농예화학과는 어쩐지 어렵고 두렵기는 하나 일본에서는 대단히 수준이 높은 인기 있는 분야여서 조선에도 한 학과를 설치하려고 할 때 기존의 수원농림전문학교에 설치하는 것보다 다른 또 하나의 전문학교를 만들면서 설치하게 되었는데, 그 후보지로 대구와 이리의 두 농림학교가 경합하여 결국 대구로 낙찰되었다고 하니 역시 대구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입학시험이라는 것이 그 당시는 일본사람이 대부분이고 한국 사람은 몇 사람 뽑지 않으므로 붙는다는 것은 결국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정도로 어려워서 안전책으로 현재의 특차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시험일자가 빠른 대구사범전문학교에 시험을 치게 되었다. 이럭저럭 날짜가 지나 발표가 나서 보니 두 곳에 다 같이 합격한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대구사범전문학교는 대단히 유망한 곳이고 대구농업전문학교도 잘 모르기는 하나 모두가 다 같이 동경하는 곳이니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하던 차에 영동의 같은 동네에 계시는 영동농업학교의 도고로야마 교장선생님에게 상의 하였더니 농예화학과라면 단연코 농전에 가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 교장선생님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 실과 농예화학과를 졸업하신 분이었다. 여기서도 나의 인생의 갈림길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사범전문 쪽으로 갔더라면 현재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지금쯤 고등학교의 교장 정도 하고 있겠지.
적절하게 인도하여 주신 도고로고야마 교장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고 아마 유명을 달리 하셨을 연세이니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 바이다.
인생은 종이 하나 사이로 그 장래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