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예화학과는 유일하게 일본군에 징집되어 가는 것이 면제되는 학과이므로 전국에서 모인 많은 지원자 중 30대 1의 입학전쟁에서 약 60명이 합격하였다.
1945년 4월 초에 대구농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대구농업전문학교가 대구농림학교에 임시로 같이 있었는데, 수시로 일본군의 대부대가 학교에 왔다가 다시 어디로 가고 하여 상당히 어수선하였다. 은밀히 들리는 바로는 한반도 남쪽의 미군상륙을 맞이하기 위하여 만주에서 관동군이 비밀리에 이동한 것이라 한다.
매일 하루의 수업은 오전은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대개 농학과와 같이 포장에 나가 채소 재배 등의 실습을 하였다. 그러니 강의야 새로운 것이니 그런대로 괜찮으나 오후에 실습을 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농업학교에서 매일 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천안농업학교에서 온 맹혁재 군(현 충남 모 고등학교 교장)과 의기투합하여 묘안을 생각해냈다. 명색인 농업전문학교라 말이 두 마리 있었으므로 가도(加勝) 실습주임 교수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친척 한분이 대구에서 말굽 편자를 박는 철공소를 하고 있으니 저 말을 그곳에 끌고 가면 얼마든지 공짜로 말굽 편자를 갈아 끼울 수 있다고 하였더니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맹 군과 나는 각각 말 한 마리씩을 끌고나와 말 위에 태고 대구의 남산동 일대를 꺼덕거리고 누비니 그 당시는 자동차도 극히 드물어 조용하고 넓은 길에 난데없이 말을 탄 두 사나이가 나타났으니, 눈이 휘둥그래져 모두 다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젋은 나이에 천지를 얻은 것 같고 모든 것이 눈 아래 돈짝만하게 작게 보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며, 풋내가 나는 젊음의 한때였다.
남산동 뒤쪽이든가 하여튼 말굽편자를 갈아 끼우고 마냥 시간을 보내다가 실습이 끝날 무렵에 학교에 돌아갔다. 이와 같이 한번 길을 낸 다음에는 이 짓을 2주일에 한번 정도 되풀이하였으니, 하여튼 젊은 날의 장난어린 신나는 회상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짓도 오래 계속하다보니 탈이 나고 말았다, 하루는 말을 타고 철공소에 갔다가 말을 매어 놓은 채 마냥 놀다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쯤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매어 두었던 말고삐를 푸는 순간이었다. 말이 쏜살같이 뿌리치고 달아나고 말았다.
급히 뒤쫓았으나 말은 간데 온데 없게 되었다. 큰일이다! 그때 말 한 마리가 어떤 존재인데! 걱정을 태산같이 하면서 할 수 없이 학교에 가보니 말은 마굿간에 엄연히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노는 것이 너무 늦어 말은 급히 자기 마굿간에 돌아간 것이다.
그 당시 대구농업전문학교는 농학과도 대동소이하나 농예학과의 1학년 학생은 약 60명인데 일본학생이 약간 많고 한국 학생은 김상순, 김정용, 김종해, 강원호, 남궁희, 박찬영, 박배근, 배원두, 서순철, 신윤종, 이상건, 이동석, 이재견, 이준구, 이경희, 이응신, 이한교, 오왕근, 조성진, 장재용, 하수종, 필자 등 20여명이었다.
우리보다 1년 위인 2학년이 최고학년으로 있었는데, 2학년에는 한국학생의 수가 더 적어 20명이 채 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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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농업전문학교 입학 전의 청주농업학교에서의 실습광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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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는 남산동의 높은 곳에 위치한 어떤 교회 선교사의 사택이었는데, 객지에서 온 학생은 대개 여기에 들어 있었다. 선교사집이라고는 하나 대단히 커서 한방에 두 사람 씩 들어있고 지하실이 널찍하여 식당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은 처음에 기숙사에는 소위 호연지기를 기른답시고 왜 그리 상급생들이 들볶는지 스톰인가 대킨쇼인가 밤마다 외쳐대면서 괴롭히는지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나보다 한살 위인 농학과 학생은 하나씩 일본군에 징집되어 나갔다. 하병욱 군(후에 경북대학교 교수였다가 자영한다고 함)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 후 해방이 되니 군에 간 줄만 알았던 하군이 지리산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용감하게도 그간 산속에 숨어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해가 일제가 저지른 전쟁의 막바지 순간이 되어서 그런지 식량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식량배급제가 실시되니 시내에서는 돈을 주어도 식사다운 것을 사먹을 수가 없었다. 단지 중국식당에 가면 ‘팔보채’라고 여덟가지 나물을 넣어 끓였다는 나물죽으로 유일하게 허기를 메꿀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제한된 배급 쌀로 지은 얼마 되지 않은 밥을 먹으니 학생들은 언제나 허기가 져 있었으므로 아침에 점심 도시락을 싸주면 한참 나이의 학생들은 도시락을 앞에 놓고 고민을 한다. 삼수갑산을 갈망정 지금 먹고 말까! 아니야 참았다가 점심 때 가서 먹어야지! 이러는 사이에 반 이상의 학생은 점심 도시락을 아침에 마저 먹고 만다.
털레털레 학교에 걸어가서 오전수업과 오후수업을 하고 난후 그냥 기숙사에 돌아오면 배고픈 것을 참을 길이 없다. 으레이 중국집에 가서 영양가 문제는 제쳐둔 채 그저 나물죽으로 배를 채우든가 아니면 그 당시 시내극장에서는 일본의 전쟁을 미화하는 영화가 한참 상영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보면서 시간을 때운 다음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기숙사에 들어오곤 하였다.
그러던 중 한 달에 한번 꼴로 유병경 군(후에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장)을 하다가 도미하여 작고함)의 집에서 특사가 오면 보따리에 먹을 것을 잔뜩 장만해가지고 찾아와 풀어놓으면 이것은 한국학생인 우리들의 차지이므로 때 아닌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가 탈이다. 모두 허기진 배속에 너무 과다하게 집어넣었으니 밤에 변소 입구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상당히 길어지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유군의 아버지는 그 당시 강원도 도지사를 지낸 처지여서 우리들이 톡톡히 그 덕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학기 중에 교련훈련이라는 것을 하였는데, 교관이 지금의 화염기 같은 것을 만들어서 엎드려 있다가 적의 전차가 가까이 오면 벌떡 일어나 전차 속으로 먼저 넣는 방법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대구 지방학생들이 약간 많았으나 강원호(현 김일성 대학 교수라 함), 윤한교(충북대학교 교수였다가 작고)등 38선 이북에서 온 학생도 있고 기타 여러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는데, 대구 지방 학생은 서로 간에 이미 친분이 있어 학교의 실습시간 등에서 그들끼리 나름대로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타지방 학생, 특히 이북에서 온 학생들은 그들의 경상도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여 한곳에 모여 수군댔는데, 허기진 뱃속사정도 영향을 주어 불평을 하며 그들 사이에 위화감 같은 것이 생기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