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가 지나 여름방학이 되어 영동 집에 와 있던 사이 8월 15일 해방이 되니 천지가 우리 세상이 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별로 예민하지 못하던 우리들에게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감격이었다.
일본 사람은 쪽도 못쓰고 풀이 죽어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우연히 보니 영동농업학교 교장이신 도고로아마 선생님이 어느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신변의 위험을 생각하여 안전책으로 밤에 산의 어느 곳에 가서 지내시는 모양이었다. 무슨 도움이나 줄까 생각하였으나 그때의 격렬한 반일감정 환경에서 주위의 눈이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2학기가 되어 대구의 학교에 가보니 일본인은 교수와 학생 할 것 없이 모조리 자기나라에 가버리고 한국인 교수로는 이봉희 교수(후에 고려대학교 교수로 가셨으나 6.25사변 후에 작고) 한분만 남아계셨다.
얼마 남지 않은 학생을 모아놓고 한 시간 강의를 하셨다. 비료학 강의이나 강의는 배일사상이 고조될 때인지라 주로 일본말로 강의 하는 것도 문제였다. 여하튼 남은 한분의 교수로는 도저히 교육이 될 수 없었다.
해방당시 수원농업전문학교에도 조백현 교수님, 지영린 교수님과 현신규 교수님 세분이 계셨으나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두 학교가 다 같이 교수 부족으로 교육을 할 수 없었으므로 대구농업전문학교가 수원으로 이전하여 두 학교가 병치되어 실질적으로는 한 학교로서 강의를 위시한 교육의 진행 되었다.
그 당시 수원농업전문학교에는 농예화학과가 없었으므로 대구농업전문학교의 학생만으로 과의 이름을 바꾼 농화학과의 학생을 이루게 되었다.
홰방 후의 좌우익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가 어수선함과 함께 학교도 그 영향을 받아 좌익 학생 우익학생 간에 암투가 심하였다. 어떤 때는 우익학생들은 떼를 지어 밤에 기숙사를 습격하기도 하고 좌익학생들은 주소가 일정하지 않게 이곳저곳 주소를 바꾸어가면서 자기도 하였다.
학교 강의도 그다지 충실치 못하였고 기숙사라 하여도 식사는 형편이 없었다. 때로는 주먹밥에 소금을 묻혀 먹는 수도 없지 않았다.
이럭저럭 수원에서 한 학기를 지내는 동안에 대구농업전문학교는 다시 대구로 내려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수원에 남자는 잔류파와 대구로 내려가자는 복귀파의 두 파로 완전히 갈라졌는데, 대개 집이 대구지방인 학생은 복귀파이고 충청도 이북학생은 잔류파였다.
이리하여 46년 3월에 대구농업전문학교는 대구로 내려갔는데, 이것이 2년제 초급대학이 되고 말았다. 수원농림전문학교에는 원래 농예화학과가 없었으므로 잔류파 학생으로 하여 1946년 3월에 농화학과가 새로 생겨 1년 위의 학생(김병건, 유광수, 박윤중, 오상훈, 장성교, 채희수 등)을 2학년으로 하고 우리들이 2학년이 되어 수원농림전문학교 농화학과에 전입학을 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46년 6월 19일 미군정 당국은 경성대학, 구 경성의전, 의전, 법전, 수원농림전, 경성공고, 경성상고 등을 통합하는 국립대학교 설립을 발표하고 8월 23일 국립서울대학교를 신설하게 되었다. 이 설치과정을 전후하여 일어난 소위 국대안 반대의 소용돌이는 학원역사상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여기는 다시 적지 않겠다.
그런데 임시방편으로 학제에 특전이 하나 생겼다. 즉, 학생이 전문부에 그대로 남게 되면 총합 3년간 공부해야 전문부를 졸업하게 되는데 전문부를 졸업한 후에 학부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 당시의 학생은 신설된 서울대학교에 시험만 치면 그대로 4년제 서울대학교 1학년에 입학할 수 있어 1년간을 이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는 사회가 불안할 뿐만 아니라 특히 38선 이북에서 월남한 학생들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기타 형편이 말이 아니게 고생을 하고 있었으므로 우선 안전하게 전문부 졸업장이나 하나 따놓고 보자는 신중안전파도 많았다.
따라서 다시 전체 학생이 둘로 나누어져 전문부에 남아 그대로 졸업한 친구(김상순, 김년진, 윤한교, 하영달, 박찬수, 배효원, 조성진, 남궁희, 오왕근 등)가 있는가 하면 나를 위시한 몇 사람(이재견, 신윤종, 이동석, 조덕현, 맹혁재 등)은 시험을 쳐서 학부 1학년에 다시 입학을 하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신학기가 되자 서울대학교 학부 1학년 학생은 단과대학의 종류에는 관계없이 이과계 학생들은 서울에 있는 본부 교사(校舍)의 교실에 전부 한꺼번에 몰아 넣어 한 반을 만들어 교양과목을 수강 공부하게 되었다. 아마 전부 40명 정도의 크라스라 기억된다.
철학은 안호상 교수, 국문학은 이병기 교수, 독어는 김삼규 교수, 해신학은 박경찬 교수, 무기화학은 최상업 교수, 물리학은 박철재 교수 등으로 기억나는데 자연과학 과목은 강의를 쉽게 하여 학생이 알아들을 정도면 권위가 적고, 잘 이해하지 못하게 어렵게 가르치면 진짜 학문을 배우는 기분이 나는 때였다.
예를 들면 박철재 교수님의 물리학은 필기한 것을 아무리 읽어봐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오리무중이었다. 대체로 이론과목은 긴장되고 지루한 수업이었으나 이병기 선생님의 국문학 시간은 농담섞인 구수한 강의로서 긴장이 싹 풀릴 뿐만 아니라 지금 말로 스트레스 마저 해소될 정도로 가장 재미난 시간이었다.
나는 그 당시 영동 친구인 이탁영, 곽용호 군(후에 필리핀 대사관에 근무하다가 작고)과 함께 서울 양동 남산 올라가는 곳에 이 군의 친척 되는 집에 하숙을 하고 연건동의 학교에 매일 다녔다.
그 당시 서울은 인구가 적고 전차가 다니기는 하였으나, 전차가 일단 정류장에 서면 한없이 기다렸다가 떠나는 까닭에 걷는 것보다 오히려 더 느렸다. 따라서 나는 하숙집에서 아무 도로나 횡단하여 거의 학교를 향하여 직선이 되게 가까운 쪽으로 아무데나 걸어 다녔다. 따라서 청계천을 거치는 수가 많았다 .
1학기가 끝나고 2학기가 끝나갈 무렵 다시 학생들의 등록거부의 선풍이 불어 누구나가 등록을 하지 않은 채 대세를 관망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길에서 문리과대학의 물리과에 다니는 정보통인 동향의 최원동 군(자유당 때 국회부의장을 지낸 최순주 씨의 조카)과 마주치게 되었다.
최 군이 말하기를 오늘 오후 몇 시까지 등록을 하지 않으면 전부 제적처리한다는 것이었다. 놀라 급히 학교에 가서 2학기 등록을 마친 다음 평소에 친하던 맹혁재 군을 삼청동에 찾아가서 사정을 알리고 등록을 하게 급히 보냈으나 이미 마감시간이 지나 등록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맹 군은 영영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므로, 그 후 할 수 없이 천안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서게 되었다. 전문부도 완전히 마치지 못하였으므로 처음에는 그 당시로서 고등학교 교사 자격을 가진 사람이 적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친구의 앞길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을 이길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