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천 김준호 선생의 ‘한 삶을 학문과 더불어’는 말 그대로 평생 공부의 길을 걸은 학자의 기록이라 하겠다. 특히 일반 명사로서 학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딸깍발이 선비’로서의 한 삶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삶을 학문과 더불어’는 ‘한 삶을 자연과 더불어’와 전 2권 1세트로 출판되었다. 한 삶을 학문과 더불어는 ‘전생(全生)’을 기록한 회고록, 한 삶을 자연과 더불어는 선생의 전공인 ‘식물학(植物學)’에 대한 이론적 사유를 담은 자전에세이 격이다.
여기서는 회고록인 ‘한 삶을 학문과 더불어’만을 평론하기로 한다.
‘한 삶을 학문과 더불어’ 전편에 흐르는 맥이 하나 있다면 한 생물학자 이전에 선생은 원초적으로 자연과 전통을 사랑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회고록 아무데서나 잡히는 대로 펼쳐 읽는다 해도 ‘아, 이 사람은 천생 학자구나’ 혹은 ‘식물학도로서 인생을 살아 가고 있구나’하는 절차탁마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형적인 딸깍발이 선비
회고록에서 느껴지는 선생의 인생은 슴슴한 냉면 맛 같다. 그렇지만 씹을수록 뒷맛이 깊고 강력한 맛이 난다라고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지만 깊은 천착이 있는 것이다. 서두에 자연과 전통을 삶에 중시했다고 밝혔거니와 그의 어렸을 적 고향에 대한 서사를 보자.
"애터의 동북쪽에 고봉산이 솟아 있고,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내려오면 앳재가 나타난다. 애터와 방죽굴의 앞을 남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골짜기를 냉정골이라 부르는데 여기에서 흐르는 물이 냉정제(또는 애터방죽)에 모인다. 고봉산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능선 중에서 광굴 동북쪽에 있는 산을 서당메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장수의 지팡이 구멍과 오줌 눈 자국이 남아 있는 장수바위가 있고, 샛고봉 동쪽에 있는 산을 동살메라고 부른다."
"논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아산리 서쪽에는 역마배미가 있었는데 아마 이 논은 옛날에 역토驛土로서 역에 세미稅米를 바치는 논이었을 것이다. 와동 남쪽에는 통사논이, 그 서남쪽에는 질때배미가 있다. 샛고봉의 서남쪽에는 차다리논이, 그 동쪽에는 방자무논이 있다. 샛고봉과 잿말 사이에는 지우논이, 와동과 엉청굴 사이에는 배쪽 같이 생긴 배쪽다리논이 있다. 이밖에도 1년 내내 물이 잠겨있는 무논, 장마 때 물이 차이는 둠벙배미, 물길이 나빠서 볍씨를 직파하던 파종배미 등이 있다. 이들 이름 있는 논은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
식물학자의 관점적 서사가 물씬 풍기는 문체이고, 고향을 무척 사랑한다고 선생 스스로 전제했거니와 고향 이전에 세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향후 회고록에서는 이런 산업화 이전의 전형적인 농경사회의 농촌용어가 담긴 서사를 보기 힘들 것이다.
풍속에 대한 중시는 세계에 대한 애정
전통에 대한 서사도 재미를 넘어 잊혀져가는 기록적 가치가 있거니와, 이런 풍습의 표현에서 하나의 실존적 삶의 의례로서 다가오기도 한다.
"섣달 그믐날은 집에 있는 모든 등을 닦거나 새 종이로 발라서 밤에 집 안팎을 밝혔다. 그리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온 밤을 지새우는 풍습이 있었다. 어른들은 ‘졸거나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단다’고 하던가. 어린이들은 졸음을 참아야 했다. 이러한 풍습을 해지킴〔守歲〕이라 했고, 섣달 그믐날 밤을 제야除夜, 제석除夕 또는 세제歲除라 하며 그 세속이 꾸준히 계속되었다."
"해산한 지 3일에는 삼짚과 탯줄을 왕겨불 속에서 태우거나 삼짚에 싼 탯줄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방죽물에 가라앉혔다. 아기가 태어나면 곧 문 앞에 금禁줄을 걸었다. 금줄은 왼새끼줄에 숯을 꽂고, 숯 사이에 아들은 통고추를, 딸은 솔가지를 각각 세 개씩 끼워서 성을 표시하여 부정不淨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아기의 점지와 생모와 아기의 건강 장수를 맡아본다고 믿는 삼신三神할머니에게 세이레(三七)를 차리는데 이렛날에는 아침 일찍 흰밥과 미역국을 바치고 두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렸다."
서울대 교수와 학술원 회원을 지냈으므로 학자로서는 최고봉에 올랐지만 선생의 학창시절을 보노라면 행간에서 우등생임은 눈치가 채어지나, 공부를 잘했다거나 혹은 반장 같은 것을 했다는 얘기는 없고, 다만 학업의 환경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겸손한 선생의 품성이겠지만 회고록 저술의 한 귀감으로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중학과 3학년 때 미술에 흥미를 가졌다. 내가 그린 수채화가 미술실 게시판에 몇 번인가 붙여졌기 때문에 장차 미술가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송주택宋柱澤 선생님이 생물반을 모집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생물반 모집의 게시판을 보고 선뜻 응모하여 생물실에 출입하였다. 그 무렵에는 전기 사정이 나빴으므로 새벽녘까지 호롱불로 지샜고, 내방은 기숙사에서 불이 꺼지지 않는 방으로 이름이 났었다. 덕분에 3학년 때에는 결석 일수가 무려 43일이나 되었다. 나만의 나태가 아니고 대학입시 준비를 하는 친구들은 모두 결석이 많았던 것이다."
"큰형님께 서울사대에 입학원서를 냈다는 보고를 드렸다. 입학만 해놓고 초등학교에 취직하여 돈을 번 다음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큰형님은 어이없는 얼굴이고 어머니는 입시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아닌가
강조하거니와, 회고록이 그 어느 문학 장르보다 훌륭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불신을 받는 것은 자기 자랑이나 장점만을 부각시킨다는 것 때문이다. 회고록을 쓰는 이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고, 살아오면서 실수, 혹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게 인간이다. 그런 측면에서 신이 아닌 인간의 기록은 부족함에 대한 고백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잘못이나 단점을 고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그러한 회고록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한 삶을 학문과 더불어’의 또 하나의 미덕은 자신의 단점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대학교 시절의 한 대목을 보자.
"급우들(class mate)과 어울리다 보니 내 성격의 장단점이 조금씩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학문에 진지한 나머지 사회 상식이 적고 비타협적이며 우월감이 강함을 발견했다. 체격은 균형 잡힌 친구들에 비하여 밀대처럼 가늘었고 몸이 약해서 지구력이 없으므로 급우들과 술자리나 그밖의 놀이터에 오래 앉아 있기가 짜증이 났다. 그래서 혼자서 우두커니 서 있기 일쑤여서 김종목은 나에게 「말뚝」이라는 별호를 붙여 급우들 사이에는 그 별호가 통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자기 발견한 성격의 결함을 교정하려고 일생 동안 노력하였지만 행동의 구비구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상아탑이라는 학문의 공간이라고 해서 우아한 조직은 아니다. 어떤 대학자(大學者)라 해도 사람관계 속에서 시기, 혹은 협잡 같은 갈등을 겪지 않고 사회생활은 할 수 없는 것일 터. 그런 점에서 아래의 구절을 재미있는 한 대목으로 소개해 본다.
"교양과정부에 취임한 뒤 문리대 식물학과 실험실 내에 앉을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것은 이민재 교수의 호의 때문이었다. 며칠 나가서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출입하는 젊은 사람들의 눈짓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그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나에 대한 눈총임을 짐작하였다. 나는 석사논문을 그 실험실에서 썼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앉아 있었는데 이 교수님의 호의가 젊은 사람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은 듯 하였다. 나는 책을 챙겨 들고 실험실을 나와버렸다."
선생의 회고록은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어떤 독자들은 큰 실망과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가치중립적으로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나, 선생은 세상 일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불의의 시대에는 항상 학원(學園)가에서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학생들의 희생과 신세를 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학생들의 불의에 대한 항거에는 어용교수 시비도 있었지만 스승들의 뒷받침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1980년 5.17 때의 지식인으로서의 선생의 사유는 너무 일상적이다.
"잊혀지지 않는 일의 하나는 80년 5월 17일 밤에 대학이 무장군인들에 의하여 접수될 때의 사건이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하지 말라는 전화를 받고 약 2주일간을 집에서 비실거렸다. 세상의 소식이 모두 끊겼지만 여대생이었던 장녀(혜원)와 차녀(정원)가 휴교로 집에 머물러 있어서 매일 커피 대접을 받는 흐뭇한 분위기 속에서 지낼 수 있었던 모처럼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세상 일에 무관심을 넘은 무심함은 학자의 삶에서 양해되는 일일까
정변으로 정치지도자와 학생들이 잡혀가고 정치, 사회가 뒤집어지는 그 시국에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있어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하며 흐뭇했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그만큼 세상일에 관심 없는 천생의 서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너무 무심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사실 대학도 자연과학 계열보다는 사회과학 계열에서 정치, 사회에 민감하긴 하다. 물론 진보나, 보수의 정치적 이념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어떤 편에 서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한국현대사의 정치격변기를 무색무취하게 지내온 것 같다. 아래의 80년대 교수시절의 담담한 몇 구절은 그런 혐의를 더욱 뒷받침 해준다.
"치의예과 학과장(81년 1학기)을 맡았을 때 학생 데모는 더욱 심화되었고 나는 편할 날이 없었다. 치의예과 1학년 학생이 도서관 난간에서 독재에 대항하여 자살하겠다고 소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학년 대표가 퇴학을 맞는 불상사도 있었다."
"식물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동안(82년 2학기-84년 1학기)에도 학생 데모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 기간에 문제 학생에게는 담당 경찰관이 묶여지고, 문제 학생을 강제로 여행을 시키거나 휴학을 시켜서 데모에 끼이지 못하도록 하며 학생들이 잡혀가지 않도록 학부형과 연락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는 학생을 면회하거나 각서를 쓰고 빼내오는데 신경을 써야 했다."
"학생들은 둘만 모이면 민주화 노래를 부르고 셋이 모이면 어깨동무를 하며 넷이 모이면 데모를 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선언을 고비로 하여 학생 데모는 서서히 잠재워졌다."
어머니 죽음의 한 일화에서 자연과학자인 선생은 세계를 과학만능이 아닌 초자연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선생의 한 경험을 넘어 우리의 삶, 실존적으로 한 단초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죽음 너머 또 다른 세계가 있고, 영혼이 이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임종에 임박해서 혼백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신다. 우리 집에서는 큰 참죽나무로 판자를 낸 어머니의 관재棺材(널을 만드는 재료)를 작은집에 보관해 놓았었다.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들들은 그 관재로 치관(治棺: 관을 짜서 만드는 일)시켰다. 그런데 의식을 회복하신 어머니는관이 참 좋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의 신경을 거스릴까 보아 치관에 관해서는 함구했는데 마치 현장을 돌아보신 듯이 말씀하신다."
"또 의식이 회복되었을 때 내가 가려는데 무엇인가 걸려서 가기 어렵구나하신다. 가족들이 온통 신경을 곤두세워 방안에서 걸릴만한 것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출상出喪 날에야 앞집의 울타리 밖으로 모과나무 가지가 뻗어 나와 그것을 자르지 않으면 상여가 걸려서 지나지 못하게 됨을 발견하였다. 자손들이 모르는 동안에 어머니의 혼백은 집 주위를 마지막으로 살피셨는지 그렇지 않으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인생’과 ‘직업’을 나는 전 2권 1세트로 만들어졌다. '삶'과 '일'을 '회고록'과 '수필'로 나누어 낸 것은 좋은 아이디어이며 기획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표지가 양장에 디자인 없이 제목만 있어서 논문책 같고, 첫 인상이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막상 책을 들게 되면 어떤 선입견을 주지 않는 심플한 회고록으로 다가온다.
비매품이어서 보관용 출판이라는 성격도 있는데, 격조있는 책으로서 서가에 꽂아 놓고 생각날 때 마다 볼만한 회고록이다. 선생이 학교를 정년퇴직하고 후진들과 함께 연구를 해온 ‘여천생태연구회’를 통해서 출판했다.
여천 김준호 회고록 '한 삶을 학문과 더불어'
여천생태 연구소 2000. 2. 10. | 비매품 출판.
페이지 505 | 판형 신국판
by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