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에서 구미, 구미에서 사상으...

영동에 오니 천지는 아무 일 없는 것 같이 고요하여 북쪽의 전쟁 끼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평온하고 무료한 나날을 며칠 보냈다.

실제로 서울은 28일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7월 5일 딘 소장이 지휘하는 미 지상군부대가 오산 부근 쑥고개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그런 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고 평화스럽기만 하였다.

그러나 마침 영동집은 국도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한 십여 일이 지나니 대낮에는 평상시와 같이 평온하나 밤만 되면 수없이 많은 자동차가 불을 켜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볼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실제 북쪽에서의 전쟁상황과 일단의 민심반응의 평온함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던 것을 감안하여 집의 어른에게 피난 갈 것을 의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 이렇게 평온한데 무슨 피난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일 밤의 남행 차의 행렬과 함께 나의 끈질긴 권유가 주효하여 피난을 가기로 하였다. 집이 정미소였던 관계로 삯방아를 찧어 받은 보리와 밀 등의 양곡이 많았는데, 이것을 팔고 집의 중요한 살림을 두 대의 우마차에 실어 선산군 구미면 달곡동의 누님 댁으로 가게 되었다.

가족 중 형님 두 분만을 그대로 남게 하고 다른 전 식구는 기차로 내려 보내고 필자가 피난짐을 우마차 두 대에 실어 일단 김천으로 인도하였다. 피난 집은 김천에서 다시 우마차를 마련하여 바꾸어 실어 구미면 달곡동까지 갔다.

구미 누님 집에 가니 또다시 천지가 조용하여 무료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동안 전쟁뉴스는 별로 들리지 않고 설사 라디오뉴스를 들었다 해도 믿을 수 없는 것이 그때의 형편인데 주민의 일상생활은 먼저 번과 같이 너무나 평온하여 피난 온 우리 식구가 남 보기에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참다 못 하여 나는 단신 영동에 올라가 볼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영동에 남아있던 형님 두 분이 자전거를 타시고 허둥지둥 들어오시면서 인민군이 옥천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우리 식구는 다시 많은 살림 중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만 챙겨서 일행 27명이 약 4km 떨어진 구미역까지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대구에 내려 친지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대구에서 20여일 지나고 나니 전쟁의 그림자가 차차 그곳까지 다가와 젊은 사람을 군에 보내기 위한 모병의 기운이 짙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우리 일행은 걸어서 경산에 있다는 친지집을 찾아 나섰으나, 정확한 주소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그 집을 찾지 못하여 할 수 없이 그대로 남행하게 되었는데, 어린이를 포함한 총 27명(아버지, 어머니, 큰형님 내외와 그 조카와 질녀인 성호, 원호, 민호, 건호, 년호, 진호, 작은 형님 내외와 그 조카 질녀인 명호, 창호, 광호, 그리고 둘째 형수와 오빠인 민병길 씨, 셋째 누님과 생질 생질녀인 박소용, 박창용, 박선용, 셋째 누님과 생질 생질녀인 김경자, 김창남, 우리 내외)의 대가족이 너절한 피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어깨에 메고 행렬을 지어 정처 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때가 되면 어느 곳이든지 그 자리에서 밥을 해먹어 가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행보를 재촉하니 어린아이를 업고 걷고 하여 도무지 느리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 당시 건강이 좋지 못하여 피난 갈 때 별로 짐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이것이 4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아내한테서 가끔 공박 받는 약점이다.

특히 물금고개를 넘을 때 도중 날이 저물어 밤이 되어 민가에 가서 하룻밤 유숙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연제 밤에 공비가 습격할지 모르는 상황잉어서 그런지 아무 집에서도 집을 빌려주지 않아 난처하였다.

그러나 이곳저곳 헤매던 차에 마지막에 어느 집의 마당을 빌려주어 거기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삼랑진까지 걸어갔다가 거기서 기차를 타고 사상역에 가서 내려 근처에 있는 동회의 공회당을 얻어서 그곳 마룻바닥에서 우리 일행이 신세를 지게 되었다.

▲ (上) 사상 피난 시절 발급 받은 교수 조무원 신분증 (下) 농대 발령 신문기사

사상에서의 피난

사상에서는 전 식구 27명이 피난생활을 하고보니 하는 일 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더운 여름에 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 멀리서 대포 쏘는 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라디오로 들려오는 전황을 전적으로 믿을 것도 못되니 인민군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하여 낙동강 북쪽에 진을 치고 8월 15일까지 인해전술로 공격해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때 일본서 날아온 B-29폭격기가 융단폭격을 하여 공격태세에 있는 인민군에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이것저것 불안하기 짝이 없다.

밤만 되면 방위군이 우리가 피난하고 있는 곳에 들이닥쳐 젊은 사람을 찾으려고 혈안이었다. 형님과 나는 모병하기에 알맞은 연령이었으므로 그때마다 공회당 깊숙이 숨고 더러 가족이 앞에 진을 치듯 안보이게 막고 앉아 이럭저럭 하루하루 징발을 모면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거의 매일 간을 졸이는 시간을 보내게 되어 불안함을 참기 어려웠다.

견디다 못하여 나는 8월 12일 낮에 어른 모르게 출타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사상중학교에 가서 김길준 교장을 만나 나의 신분과 처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즉, 쾌히 즉시 그 학교의 교사 신분증을 만들어주었다.

비로소 행동이 자유스럽게 되어 부산에도 왕래할 수 있었으므로 그 당시 경상남도 도청에 들어있던 문교부에 가서 옛날 신청하였던, 교수조무원의 신분증도 우연히 길에서 뵙게 된 현신규 선생님의 도움으로 발급받아 더욱 자유스럽게 부산시내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공무원은 모병연기가 되게끔 되어 있었다. 늦으나마 이 지필을 빌어 현신규 선생님과 김길준 교장의 호의에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사상 피난생활에서 가을이 되니 사상중학교가 개학이 되었다. 그러나 학교교사(學校校舍)는 군에 징발되어 유엔군 훈련소가 되어 있어 학생에 대한 수업은 산에 가서 하게 되었다. 나는 영어를 가르쳤다.

유엔군으로 징발된 병사가 사상중학교에 2주일의 훈련을 마치면 일선에 출장 나가게 되는데 사상중학교 학생들이 그때마다 사상역에 가서 군인들의 무운장구를 빌며 환송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