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작은 예수님
오후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사제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사무장이 다급한 소리로 대학병원에 위급한 환자가 있으니 병자성사를 주셔야 한다는 보고를 했다. 급히 병원 응급실에 들어서자 40대쯤 보이는 부인이 내 손을 잡으면서 우리 아들 좀 살려달라고 나를 환자 앞으로 안내했다.
사연인즉 형편이 어려워 시내 반지하 가게에서 두 아들과 칼국수집을 하는데 두 아들은 가게에서 자고 어머니는 출퇴근을 했단다. 어머니가 아침 출근해 가게에 와보니 아들 형제가 연탄가스로 쓰러져 있어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는 것이다. 이때에는 연탄가스 사고가 많았다.
어머니는 나를 ‘예수님’이라고 불렀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당황되었지만 그들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성당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 소식이 없어 궁금했다. 그래서 칼국수집을 방문했다. 칼국수집에 들어서자 주방에는 젊은 열심히 요리를 했고 카운터에는 아줌마가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아, 모두가 무사하구나 생각하고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나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칼국수 한 그릇을 시켜먹고 성당에 돌아왔다. 그날 오후 3시경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점심때에 키 작은 예수님이 다녀가셨는데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묻자 바쁜데 장난전화 말라며 끊어버렸다.
4시경에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전화를 했다. “여기는 중앙성당입니다. 지난번 사고 때 얼마나 놀라셨습니까?”라고 묻고 오늘 점심 때 키 작은 예수님이 찾아가셨는데, 보셨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때서야 “신부님 죄송해서 어찌합니까? 신부님을 몰라보았습니다.”라며 공손히 사과를 했다.
병원에 갈 때는 사제복을 입고 갔고 가게에 갈 때는 사복을 하고 갔으나 당연히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급한 상황에 나를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짓궂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언젠가 그 여인을 만나면 지금도 나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다.
그동안 세월이 흘러 40년이 넘었지만 그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두 아들은 지금 중년이 넘었을 것이고, 어머니는 내 또래쯤이나 되었을 텐데 모두 건강한지 안부가 궁금하다. 나는 그 뒤로 예수님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1975년 첫 본당 신부로 진안성당 부임
진안본당은 내 고향 장수와 가까운 곳이라 낯설 지 않은 곳이었다. 서두에 우리 집 조상들이 피난 온 곳이 진안 장재동이라고 소개했다. 지금도 공소가 있고 우리 고증조부 묘소도 이곳에 있다. 그 후 고증조부 묘는 1980년대에 수분리 선산에 이장을 하였고, 1990년대에는 선종하신 조상 모두를 지금의 전주 금암성당 납골당에 모셨다.
나는 진안본당에 발령을 받으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15년 동안 함께 살았다.
김병엽 신부님 술안주사건
당시에는 보좌신부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 선배 신부들이 격려차 방문해주셨다. 부임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날 쯤 김병엽 신부님이 오후 늦게 찾아주셨다. 나는 사제 초년기라 김 신부님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신부님은 오후부터 약주를 하셨다. 나는 피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얼마 지나자 신부님이 나를 깨웠다. 손님을 모셔놓고 술안주가 시원치 않다며 밖에 술안주를 마련했으니 나가보라고 했다. 나가보니 사제관 앞 벚꽃나무에 개 한 마리가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어리둥절 하는데, 알고 보니 이 누렁이는 내 선임 박성운 신부님께서 기르시다 좋고 간 것이었다. 김 신부님은 이것을 술안주로 작업을 하신 것이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사목위원들을 불러 멍멍이 술안주 작업을 시키고 밤새 대작을 하면서 신부님과의 추억을 만들었다. 그 후 다른 본당에 가서 살 때 강아지 한 마리를 보내주셨다. 이놈도 잘 키워서 한잔 하자고 하면서 정을 보여주셨는데, 강아지가 술안주 감으로 크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갔다.
신부님은 선배들에겐 예의바른 분으로, 후배들에게는 추억을 만들어주는 사제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그 분을 보내고 가을 추수를 하고 텅빈 벌판을 보는 듯 마음 한쪽에 구멍이 하나 생겼다. 주여, 그에게 안식을 베풀어 주소서. 아멘!
공소 이야기
진안은 시골이라 공소가 18곳이나 되었다. 당시 전주교구 중에 공소가 제일 많은 곳이었다. 본당 신자 수보다도 공소 신자 수가 더 많았다. 부임하자마자 보활 판공성사 일정을 공소에 보내고 3월부터는 공소 방문이 시작되었다.
공소를 방문하다보면 너무 피곤해서 중간에 손님 신부의 도움도 받았다. 성당에 속한 성모의원에 차가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공소에서 하는 식사와 잠자리는 불편하였지만 그래도 추억도 많다.
피곤해서 고백소에서 졸았던 일, 공소를 오랫동안 비웠다가 신부가 온다고 불을 지펴 구들장 사이로 스며든 그을음냄새, 잠을 자다가 쥐에게 물린 일, 방이 너무 더워 밤새 잠을 설친 일, 식사문제, 화장실 문제 등등 추억이 많다.
또 다른 특별한 추억도 있다. 당시에는 출산율이 높아 어느 곳에 가더라도 어린이 보례예식이 있었다. 보례예식이란 보충예식의 줄임말로 공소회장이 물로 씻는 의식과 세례명을 주고 사제가 빠진 예식을 보충해줌으로써 완전한 세례가 완성된다.
이때에 보례받는 집에서는 관례상 떡이나 음식을 준비해서 공동체가 나누는 풍요로움이 있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을 축하하는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가을 판공 때 수수떡이 그렇게 맛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풍습이 있는지 모르겠다. 돌아올 때는 공소에서 신나 물이나 귀한 약재를 선물로 받아왔다.
모두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인심만은 넉넉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신부가 방문하는 날이면 신자들이 동구밖까지 마중 나와 주는 정성이 지극했다. 어떤 공소는 그날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신부를 맞이하는 공소도 있었다. 영혼구원이 우선이었으니까. 지금도 이런 공소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때가 참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