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1965년 2월 20일은 대학 졸업식 날이었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는데,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앞날을 어떻게 해치고 나갈 것인가가 고민거리였다.
졸업식 날 축하객이 세 사람 왔는데, 여자 삼형제들로 천도교 학생회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천도교 중앙학생회에 가입하여 대학 다닐 때까지 활동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역사과목에 취미가 있었고, 특히 동학혁명과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깊었던 차에 고등학교 진학하고서는 천도교 본부를 찾아가서 천도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에는 수유리에 있는 수련관에서 연성회(楝成會,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모임)를 갖기도 했다. 연성회는 천도교 중앙학생회의 중∙고 대학생들의 합숙훈련으로, 말하자면 요즈음의 MT와 같은 것이었다. 수유리에 있는 천도교 수련원은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숨과 계곡이 좋았고, 올려다 보이는 백운대와 인수봉이 장엄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천도교 3대 교주이신 의암 손병희 묘소에 참배하고 낮에는 동경대전(東經大全, 천도교의 경전)을 공부하였다.
날을 잡아서 백운대를 오르는 일도 재미있었다. 모두 한 식구들처럼 따뜻하고 즐거웠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런 모임을 가져보았고, 더욱이 대학에 다니는 누님, 형들과 친하게 되어 기뻤다. 나는 3대독자의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까운 일가는 없고 삼촌이나 형들도 없어서 외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 모임에서 나를 가장 아껴주시던 누님이 계셨는데, 고향은 황해도 봉산으로 8.15해방이 되고 몇 해 지나 6.25직전에 안내자를 따라서 38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왔다고 한다. E여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이었는데, 활달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도 해주었다. 그 분 동생은 S대 농가정학4과 1학년이었고, 셋째는 S여중 3학년이었는데, 이 분들 댁에 가끔 놀러갔었다. 서울운동장 뒤에서 간장공장을 크게 하여 생활이 넉넉한 집안이었다.
이 분들의 어머니는 나를 친아들같이 아껴주셨고, 전화를 오래간만에 드리면, 요새 우리 집에 놀러 안온다고 섭섭해 하기도 했던 분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위로 두 분은 출가하셨고, 셋째는 벌써 S대학 불어불문학과 3학년이었다. 이름이 O실이라고 하는데, 내가 처음 본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이고, 그때 O실이는 중3으로 친동생같이 지냈었다.
내가 대학교 3학년일때 O실이는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서울시립대 캠퍼스에는 농장과 과수원이 있어서 봄부터 가을까지 딸기로 시작해서 토마토, 복숭아, 사과, 배 등의 과일이 철마다 생산되었다. O실이는 S여자고등하교 동창이고 대학친구인 중문과 유양이나, 때로는 S고교에 다니는 남동생 시명이를 데리고 가끔 우리 대학에 놀러오곤 했었다.
졸업식 날 선물로 와이셔츠를 사다 주었는데, 맞춘 것 같이 꼭 맞았다. 졸업식 날 이 하객들에게 점심대접도 제대로 못해드린 게 섭섭했고, 4년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께 인사도 못 드리고 정들었던 캠퍼스를 떠나야 했다.
1965년 2월 나이 스물다섯 살에 나는 영광스러운 대학졸업생이 되었다.
여자 중학교 선생님
대학 졸업식이 지나고 2월 하순 경에 교육부 연수관으로 계시던 집안의 먼 일가 분 소개로 양주군 남면에 있는 농업고등학교 교장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의정부까지 가서 남면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우리 집도 산골이지만, 경춘선 기찻길도 있고 경춘국도가 있어 교통은 편리한 곳이었는데, 남면으로 가는 길은 정말 산중이었다. 여기저기 군부대도 있어 전방이 가까운 듯 했다. 개울을 건널 때 버스는 다리 위로 건너는 것이 아니라 움푹 패인 물길을 헤치고 건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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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 졸업 후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 서울 서오릉으로 첫 소풍을 갔다. (25세의 총각 선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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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 길로 달려서 남면 면소재지에 있는 고등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더니, 다음 주부터 출근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일러 주셨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너무 벽지인데다 평생 근무할 곳도 아니고 , 또한 나는 대학원 입시준비를 해야 하고 더욱이 유학준비를 하려면 서울에 있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상명여자중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상명학원과 우리 마을은 자매결연을 한 인연으로,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등록금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빌려서 등록금을 내고 농사를 지어 쌀로 갚고는 했었다. 배상명 교장선생님은 나에게는 은인 중의 한 분이시다.
이런 인연으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여자 중학교 생물선생님이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고, 또한 학원에 나가서 영어와 독일어 공부를 할 기회가 생기게 되어 더욱 좋았다.
독일어는 고등학교 때 배우고 대학 1학년 때에도 배웠지만, 대학원에 가고 더욱이 유학을 하자면 제2 외국어로서 상당히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을지로 2가에 있는 독문화학원에 등록해서 근 1년간 초급 독일어부터 시작해서 중급독일어, 고급독일어, 독어 소설강독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하였다.
생물 선생님은 세 분이 있었는데, 심정자 선생님은 서울대 식물학과를 나온 분으로 그 부친은 서울대 교수였다. 한 학기가 지나서 그 선생은 유학을 갔고, 유학을 다녀온 후 서울여자대학 미생물학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전공은 진균(眞菌 fungi)이다. 한 분은 주영숙 선생님이신데, 상당한 미인으로 처녀인 줄 알았더니 결혼했다고 스스로 이야기해서 알게 되었다.
주영숙 선생님은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와 생물선생님을 하고 계셨다. 고향이 원산인데 부산까지 피난 길을 걸어서 내려왔다고 한다. 어머니와 딸 삼형제가 고생고생 하여서 남쪽으로 남하하였다고 하니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주영숙 교수님은 이화여대에서 교육행정학을 공부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교육행정학으로 학위를 하신 분으로, 덕성여대에서 총장과 대학원장을 지내고 요새는 취미로 조각을 하신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