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장이 되면서 나는 1, 2학년 때 하던 신학교 연합 문학의 밤과 체육대회를 학생회 주축으로 진행해나갔다.
이들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나는 여러 모임을 만들어 행사를 치르는데, 자신감이 붙었다. 내가 관심을 둔 것은 BBS(Big Brothers and Sisters Movement)였다. BBS는 세계적인 조직망을 갖춘 국제기구였다. 나는 열심히 발품을 팔아 우리 학교에도 BBS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을 통해 잊지 못할 일은 BBS주최로 ‘한, 중, 일 친선예술제’를 성대하게 개최했던 일이다. 장충체육관을 빌릴 정도로 대규모로 열린 이 예술제에는 직업소년학교 학생들을 포함해 약 3천 명 정도의 인원이 모여들었다. 이 대회는 구두닦이나 신문팔이로 어렵게 생활하는 직업전문학교 아이들과 후원자들의 축제였다.
이 대회를 후원해준 곳은 경찰청이었다. 중국대사와 일본대사까지 참석한 가운데 한, 중, 일 친선예술제는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BBS모임은 대학 때부터 직장생활을 하면서까지 10여년을 함께 했다.
또 나는 16개 대학의 써클연합회장도 맡아 문학의 밤 행사나 캠프 등의 행사를 치러냈다. YMCA청소년 지도자였다. 경복고등학교의 한샘서클과 경기여고의 은호클럽, 그리고 동덕여고의 백조그룹이 YMCA 행사에 참가해 캠프도 하고 연합모임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신발이 닳도록 각 학교의 동아리 회장을 만나 설득하러 다녀야 했다.
이런 모임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문학의 밤 행사를 준비하는 것까지 이어졌다. 당시 유네스코 청소년 부장인 유재건 선배에게 부탁하여 회의실을 빌려 하동 미팅(meeting)을 하기도 했는데, 거기에 참가한 아이들은 모두 이런 모임을 좋아했다. 그래서 매주 월요일이면 YMCA에서 월요논단을 실시했다. 사회 유명인사를 초청해 철학,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강의를 듣고 서로 토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월요논단에 열심히 참석했다. 이때 들은 연세대 김형석 교수의 철학강좌는 너무 좋아서,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들었다. 김형석 교수는 후에 내가 월드비전에 근무할 때 이사로 있기도 했다.
1968년 6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중국의 임어당(林語堂) 선생의 강의를 들었던 일도 나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생활의 발견>를 비롯해 수많은 저서를 남긴 임어당은 소설가이자 문예비평가이며 언어학자이다.
임어당은 이날 ‘전 인류 공동 유산의 추세’란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서양과 동양의 철학을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논리를 펴나갔다. 평소 시와 문학을 좋아해 문학모임에 자주 참여하던 나에게 임어당의 강연은 학교 수업을 빼고 간 것이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루쉰과 함께 반봉건투쟁에 앞장서며 신문학 운동에 앞장선 임어당의 지혜와 철학은 그 뒤로도 내게 큰 교훈을 주었다.
나는 무엇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은 내 체질과 잘 맞았다. 나는 만남 그 자체를 즐겼다. 필요에 의해 만날지라도 결국 그 만남도 즐거운 인연으로 이어졌다.
중앙신학교에서 만난 선배로는 기억나는 사람이 김만두, 노상학, 조기동, 김명우(전 대한사회복지회 회장), 조치원, 이정호, 고양곤(전 강남대학교 교수), 김영호(전 강남대학교 교수)r강기호, 조성모, 박재주 등이다.
친구들은 다양하게 많이 사귀었는데, 그 중에서도 ‘강남대 4인방’으로 불리는 친구들이 있다. 강남대 4인방은 윤기, 배광웅, 조성한과 나였다. 우리 네 사람은 모두 야간수업인 신학과 수업을 도강해 듣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신학과 사회사업을 함께 고민하다보니 마음도 잘 맞고 의기투합하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자주 모여 사회사업을 짊어지고 갈 사람으로서 미래의 삶이나 철학에 대해서 함께 고민했다. 토론을 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열중했다. 그러던 중 이름만큼 편한 호를 하나씩 갖자는 의견이 나왔다. 누구 입에서 나온 의견인지는 모르나, 다들 그 의견에 찬성했다. 나는 고집이 있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한다고 친구들이 ‘일암(一岩)’으로 지어주셨다. 또 윤기는 주마(走馬), 배광웅은 일광(日光), 조성한은 난초(蘭草)로 정했다. 호가 만들어진 이후로 우리는 이름보다 서로의 호를 부르기를 즐겼다.
내가 가진 모임 중에 ‘향협’도 있었다. 하상락 교수의 소개로 서울대 김성이를 알게 된 나는 그를 자주 만났다. 둘이 만나 이야기하다보니 그와 나 사이에 통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다 점차 다른 대학의 친구들도 끌어들였는데, 중앙대 유시화, 이화여대 정진자가 그들이다.
동아리를 만들기로 하고, 이름을 향협이라 지었다. 향상하고 협조하자는 뜻을 가진 향협회원들은 점차 늘어나 20여명이 넘었다. 향협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서로 만나 논문을 발표하거나 토론을 하며 지냈다. 향협은 대학시절부터 시작해 직장생활을 할 때까지 계속된 모임이었다.
지금껏 이어온 모임 중에 성원클럽도 있다. 성원클럽은 휘문고, 동북고, 계성고, 서울여고 등 10여개의 학교가 모인 다목적클럽이었다. 성원클럽은 주말마다 서대문 <신우관>에 모여 토론도 하고, 외부강사를 초청해 강의도 들으며 봉사활동도 하는 모임이었다.
나는 성원클럽의 지도교사를 맡았다. 성원클럽에서 개최한 문학의 밤 행사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고생하기도 하고, 고아원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가끔 나는 성원클럽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이나 여행을 가기도 했다. 성원클럽에서 강화도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몹시 쏟아지자 여자아이가 쓰러졌다. 내가 그 아이를 업고 걸어가는데, 빗길이라 그런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여자라고 하지만 고등학생이고 보니 체격도 작지 않았다. 결국 나도 힘이 빠져 빈혈증세가 왔다.
아이들과 서로 힘을 합쳐 배가 있는 포구까지 왔고, 우리는 서둘러 배에 올랐다. 하지만 배가 출발하고 나서야 30명의 배표를 다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배를 탔으니, 내릴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결혼예물로 받은 시계를 풀어 선장에게 맡겼다.
그런데 천만댜행으로 해양경찰을 하던 조카사위를 거기에서 만난 것이 아닌가. 그 덕에 나는 나에게는 소중한 그 시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을 모두 집에 보내고 집에 오니, 급속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렇게 고생을 같이 했던 성원클럽 아이들이라 그런지 그들과 맺은 인연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박영진, 박성원, 김광수, 이창수, 김완기, 이명자, 김춘홍, 김보늬, 홍세기, 이정인, 이혜숙, 박혜성 등이 성원클럽을 활동을 하며 만난 학생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