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2월 대학을 졸업한 나는 3월부터 성남교회 사회부 간사로 취직이 되어 들어갔다. 교회사회사업으로 사회복지 일생의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성남교회 주변의 서울역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지게꾼이나 리어카꾼들도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서울역 주변으로 싸구려 식당이나 술집들이 즐비했다. 또 윤락이나 폭력 등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지역기이기도 했다.
지방에서 가출한 아이들이 모이는 곳도 서울역이었다. 부산이나 목포에서 12시간이나 걸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출한 아이들을 처음 맞이하는 사람들은 대개 폭력조직패 일원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보따리를 든 채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에게 접근한 이들은 잘 차려 입은 데다가 언변까지 그럴듯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아이들은 곧잘 그들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그들이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곳은 식당이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오느라 배고팠을 아이들에게 국밥 한 그릇 사주면서 잠자리나 일 할 곳을 알선해주겠다는 친절을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꾐에 넘어간 아이들이 가는 곳은 뻔했다 남자아이들은 쓰리꾼이나 폭력조직패의 일원으로 삼고, 여자아이들은 포주에게 넘겼다. 밥을 먹으면서 곧바로 포주를 부른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아이들을 팔아넘기기 일쑤였다. 누구도 의지할 사람이 없던 아이들은 그렇게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새벽에 나가 서울역을 배회하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귀가시키는 일을 종종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의 기회였다.
성남교회에는 독일 NCC의 도움을 받아 만든 복지관이 있었다. 나는 성남교회 사회부 소속으로 이 복지관의 간사였다. 복지관에 근무하는 직원은 두세 명이었다. 나는 직원인 이희덕, 백진강과 함께 야학을 하기 시작하였다. 야학의 이름은 <삼진회>였다.
삼진회에는 처음에는 신문팔이 아이들을 집단 수용해서 공부부터 시키기 시작했다. 이곳의 야학을 통해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 중에는 나중에 서울시 의회 의장까지 지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교회복지관은 밤에는 야학으로, 낮에는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고등공민학교와 주변에 있는 노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노인대학으로 운영했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교육뿐만 아니라 상담이 필요하다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다. 가난한 사람은 마음이 어려운 사람이 많아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믿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특히 흔들리는 청소년들을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칫 잘못판단하면 범죄로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청소년들이 서울역 주변에는 너무나 많았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 나의 기도시간을 점점 늘어났다.
교회 청년들과 만나는 일도 잦았다. 함께 워크숍을 하면서 교회 사회복지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특히 야학을 시작할 당시 안철, 오철주, 이성희, 이혜정과 같은 청년들이 함께 해준 것은 큰 힘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교회 청년들과 청소년 문제, 윤락문제, 가출문제, 노인문제 등을 주제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고, 의견을 교환했다.
물론 교회에서 야학과 같은 사회사업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몇몇 장로들은 눈에 띄게 반대의사를 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힘이 되어준 사람은 이해영 목사님을 비롯해 전택완 장로, 오형범 장로 같은 분들이었다. 또 윤일주(시인 윤동주의 친동생), 나운영, 강석희 교수같은 성남교회의 엘리트들이 만든 OB클럽에서도 교회 사회부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택완 장로는 교회사업부 책임자였는데, 교회까지 걸어오며 아낀 교통비를 모아 사업부 일에 쓰라고 전해주곤 했다. 특별히 오형범 장로는 나와 관계가 돈독했다. 그는 전택완 장로의 후임으로 책임을 맡은 사회부 부장이어서 나의 직속 상관이기도 했다.
중앙신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오 장로는 시인 윤동주의 매제였다. 그의 부인이 윤동주의 여동생인 윤혜원 권사였다. 오형범 장로는 나를 좋게 보았는지, 자주 집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윤혜원 권사의 뛰어난 음식솜씨에 놀라곤 했다. 오형범 장로는 퇴근 후에도 나와 더 이야기 하고 싶어 근처 막걸리 집으로 이끌기도 했는데, 주로 하는 이야기는 교회에서 하는 사회사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 내가 교회에서 받은 월급은 만원이었다. 오형범 장로는 나를 격려하며 사비로 만원을 더 주기도 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내게 처음 술을 가르쳐준 사람이 오형범 장로였다. 퇴근 후에 오 장로는 나와 같이 걸으면서 한국젼쟁 이야기며, 교회 사회사업에 관한 이야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러다 흥이 오르면 근처 술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북출신인 그는 빈대떡과 돼지비계로 만든 동그랑땡만 있으면, 소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그 전에 한번은 몇몇 교회 사람들과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는데, 식탁위에 양주인 조니 워커가 한 병 오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해영 목사님이 식사 전 기도를 하는 게 아닌가. 목사님이 기도까지 해주시고, 따라주는 술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해영 목사는 참 자상하신 분이었다. 사모님도 나를 보면 항상 “최 간사, 밥 안 먹었지?” 하면서 내 손을 끌고 가 밥상을 차려주셨다. 나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 분이 이해영 목사님이다. 이해영 목사님이 주례 말씀을 해주시기 전 하셨던 말씀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때가 1970년 4월 11일이었는데, 그 날을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교통이 좋지 않았고, 예식 시간이 1시가 되도록 와야 할 사람들이 오지 않고 있었다. 고심 끝에 나는 목사님께 예식을 30분만 늦추자고 말씀드렸다. 그때 이해영 목사님의 말씀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결혼식은 인생의 첫출발이야. 늦으면 안 돼. 제 시간에 시작하는 거야.”
이해영 목사님은 한국기독교연합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 회장을 지내고, 1974년 인권위원회가 설립될 당시 초대 인권위원장을 맡으셨다. 초창기 인권위원회는 이해영 목사님을 비롯해 조남기, 박형규 목사, 함석헌 선생,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이 주로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