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홀트아동복지회 일을 그만두자 여러 곳에서 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 중 한곳이 서울청소년회관이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청소년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게 제 적성에 맞을 듯했다. 지도실장으로 있던 이정호 선배가 대한어머니회 총무로 가면서 나를 후임자로 추천했고, 나는 그 뒤를 이어 서울청소년복지회관의 지도실장으로 부임했다.
서울청소년회관은 서울시경찰국에서 운영하는 최초의 청소년기관이다. 운영비는 서울시에서 부담하고 감독은 서울시경찰국에서 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 힘을 배경으로 나는 평소 관심 있었던 청소년 문제와 아동문제에 힘껏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먼저 서울청소년회관에서 해야 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에 주력했다. 프로그램이 좋아야 청소년들의 관심도 끌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가을문학의 밤>을 개최하여 정서함양에 도움을 주고, 야학을 만들어 봉사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를 발판으로 야학을 통해 공부하는 아이들 중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직업기술학교반을 만들었다.
직업기술학교반을 통해 목공예수업을 하거나 체육관을 만들어 권투반도 운영했다. 권투반의 코치는 프로권투선수였던 홍수환이었다. 프로그램의 내용이 좋은데다가 무료로 진행하니 찾아오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또한 청소년회관에는 각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클럽이 등록되어 있었다. 고등학교가 50개, 대학교는 60개의 클럽이었다. 이 클럽이 해야 할 프로그램도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그 중 하나가 농촌봉사활동이었다.
청소년회관에 있던 클럽 중에 서울 소재 대학의 의대생클럽이었던, <푸른 얼>이 있었다. 이 서클은 약대, 의대, 간호대, 치대가 모인 의료봉사 서클이었다. 또 <햇빛>클럽도 있었는데, 이 클럽은 중앙대, 서울여대, 한림대 등 사회복지학과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클럽이었다,
그때 <푸른 얼> 클럽은 연세대 치대에 다녔던 김건영이 회장이었고, <햇빛클럽>의 회장은 중앙대사회복지학과 송정부였다. 나는 이들 클럽들과 함께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다녔다. 삼척 근덕으로 농활을 자주 갔는데, 그곳은 당시 서울시 경찰청장의 고향이었다.
농활을 간 우리는 근덕에 있는 초등학교에 짐을 풀고, 그곳에서 숙식을 하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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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4월 서울청소년회관 개관식 때 함께 한 이매리 전 국회의원, 박노수 관장, 나승언 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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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클럽은 사회복지학과답게 봉사활동 내용을 구성했다. 마을 곳곳을 손보거나 필요한 곳에 다리를 놓아주었고, 저녁이면 부녀회를 모아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푸른 얼 클럽은 의료봉사클럽답게 주민들에게 무료진료봉사를 했다. 농촌봉사활동으로 지역에 가게 되면 일주일동안 그 마을에서 숙식을 하면서 마을일과 주민들의 일을 도왔다.
서울청소년회관에 있으면서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또 예산을 따오느라 기획을 하다 보니 어느새 7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박봉에 잔일이 많아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 보람도 있는 일이어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다.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 중에는 여름에 캠핑을 가는 일이 있었다. 몇 년 동안 별 탈 없이 잘 진행되다가 1978년 여름캠프 때 그만 사고가 발생했다.
그때 나는 남녀중학생들을 데리고 양평의 가톨릭캠핑장으로 캠핑을 가게 되었는데, 한 남학생이 계곡 바위의 이끼에 미끄러져 물에 빠져 죽었던 것이다.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자원봉사자들이 단체를 지도하고 있었지만, 이 학생은 혼자 계곡을 가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다.
전체 책임자인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경찰서에 신고를 하자, 경찰은 아이가 죽은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지시했다. 다른 아이들은 서둘러 집으로 보내고 나는 학생 몇 명과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자, 소식을 들은 그 아이의 부모가 도착했다.
먼저 아버지가 아이가 죽은 현장으로 가기를 원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현장으로 안내하자 그는 물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한동안 물속에서 가슴 아파하던 아버지는 한참 만에 나를 보며 “이곳을 보니 죽을 수밖에 없었겠네요.” 하고 읊조리듯 말했다. 그곳의 지형과 수심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황망한 정신을 어느 정도 가다듬었는지 사고를 당한 위치가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자꾸 되뇌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오히려 현장을 지켜줘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했다. 사고 충격 속에서 할 말을 잊고 있던 나는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던진 말은 황당한 정도였다. “아, 배고프다. 여기 밥 없어요?” 자식을 잃은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는 감정에 겨운 그 아이의 엄마에게 머리까지 뜯길 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사고가 난 아이의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경찰조사가 끝나고 사고가 수습되자, 우리는 그 아이를 그 근처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집을 찾아가 위로의 말과 함께 우리가 걷은 돈을 위로금으로 전했다. 사건이 마무리 되고 난 후에도 나는 여러 가지로 자책을 했다.
철저하게 자원봉사교육을 하고,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않도록 교육을 해도 그런 엄청난 실수가 생기니, 나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