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가족
내가 돌아왔을 때, 서울은 석 달 전에 일어난 4.19혁명으로 말미암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장면 씨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 없었던 만 6년 사이에 조금은 정돈이 돼 있었으나 여전히 전쟁의 어수선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시는 1인당 국민 소득이 80달러이던 시절이었다.
내가 탄 부산행 기차는 석탄의 힘으로 달려야했기 때문에 매연과 그을음이 엄청났다. 그 때문에 삼복더위에 창문을 열지 못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열두 시간 동안, 나는 좌석도 없는데다 사람들에게 치이고, 화장실은 더럽고, 땀내와 피곤에 절어서 정말이지 녹초가 되었다.
힘들게 부산에서 진주까지, 진주에서 집까지 30분을 걸어서 마침내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나의 노부모님은 아무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금의환향이 따로 없었다.
집에는 맏딸 희규와 맏아들 태규, 둘째딸 호규가 있었다. 맏아들은 내가 유학 갈 때 한 번씩 안아보고 떠났지만 당시 뱃속에 있었던 호규는 그때 처음으로 부녀간의 상봉을 한 셈이었다. 나를 향해 방긋방긋 웃는 딸 아이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뭉클해져서 나는 얼른 아이를 덥석 안아 볼에 입을 맞추었다. 보드라운 살갖을 맏대면서 자식에 대한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모처럼 푹 쉬었다. 귀국할 때 가지고 나온 1,500달러 중 부모님과 아내에게 100달러씩을, 애들에게는 약간의 용돈을 주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올 때 거짓말로 신고한 500달러는 은행에서 환전을 해야만했다. 나머지 1,000달러는 암달러상을 통해 높은 가격으로 환전했다.
한동안 진주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나는 취업을 위해 아내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올라온 뒤, 우리 부부는 셋째 딸 혜성을 낳았다. 조금 더 훗날, 내 나이 마흔에 얻은 막내아들 윤규를 안았을 때는 또 다른 기쁨이 충만하게 샘솟았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고물고물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어깨에 들러붙은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잠깐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1960년, 한국 의학의 현주소
1960년대 초의 한국 의학은 한마디로 말해 1930년대의 일본 의학수준이었다. 1930년대의 일본은 독일 의학을 모델로 삼았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독일 의학이 미국 의학을 앞서고 있었다. 그래서 유학도 독일로 갔고 학술 및 의학용어도 독일어였다. 그러한 독일 의학의 수준은 패전국이 되었다고 한들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 아니어서, 심지어 내가 예과에 다니던 시절까지도 제2외국어서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독일과 일본의 교류가 끊어졌으나 그 여파는 고스란히 한국의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학교 의대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강의나 환자들을 돌보는 교수들은 여전히 1930년대 독일의학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을 통해 미국 의학이 많이 발전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성 의사들도 분명히 느꼈을 터였다. 미국에 공부하러 갈 기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몇몇 소수의 유학생들이 새롭게 발전한 미국의학을 잠깐씩 배워오긴 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향하는 유학생들의 숫자는 그 후 10여년이 지나도록 크게 불어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미국행 유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러나 선진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젊은 의사들 중에도 정식으로 배우고 과정을 밟은 뒤 귀국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1960년경, 일반 외과의로서 귀국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고, 그 외 병리과, 소아과, 진단방사선과, 흉부외과 등에 한두 사람이 더 있는 정도였다. 그 당시 강의를 할 때도 여전히 독일어로 된 학술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고, 내용도 그대로였으며, 실제 임상에서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교수들이 많았다. 그러니 미국에서 새로운 의학을 종통으로 배워온 몇 안 되는 존재가 금방 눈에 띄는 것은 단연한 일이었다.
나 이외에 일반외과 이용각 씨(이화여자대학교 의대), 흉곽외과 홍필훈 씨(세브란스의대), 외과 이세순 씨(세브란스 의대), 병리과 이유복 씨(세브란스 의대), 김온자 씨(서울대학교 의대), 소아과 문형노 씨, 고광욱 씨 등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더 있을 것도 같은데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는다. 자랑 같지만 사실상 현대 한국의학은 미국에서 귀국한 이들 10여명이 시동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외과의 전문의 자격을 땄다는 기쁨도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사들이 국내 병원에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