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시험에 합격한 후 나는 처음부터 사법과로 나아가 판사가 될 것을 희망하여 조선고등법원(현 대법원)에 서류를 냈다. 그러나 내가 삼일운동에 가담한 사상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서류가 접수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총독부에 지원서를 내고 총독부 인사과장 앞에 가서 면접을 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사상범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것도 가망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에 뜻밖에도 경상북도로 가라는 전보가 왔다. 인사과장의 전보를 받은 나는 그 길로 대구로 내려가 경상북도 지사실을 찾아갔다. 당시의 경상북도 지사는 엄창섭씨로 나와 같은 평안남도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친일분자였으므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며 무척 냉냉하였다. 도청에는 자리가 없으니 영천군에 가서 도 공무원으로 근무하라고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영천으로 가서 군수를 만났다. 강영규 군수는 나를 만나자 크게 당황하였다. 너무도 부담스러운 사람을 도청에서 보내 왔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내무과의 계주임으로 있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군청을 나와 그 길로 평양으로 돌아와 버렸다. 시골 군청의 계주임이나 하려고 제국대학을 나와 고등시험에 합격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나는 신의주에 있는 평안북도 보안과장 전봉덕 선배에게 편지를 보내 이 시점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전 선배는 곧 회답을 보내왔다. 행정실무를 수습함에 있어서는 총독부 본청이나 도청보다는 군이 더 좋고 읍, 면이 더 좋으니 아무소리 말고 내려가 근무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친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이렇게 권고하고 있었다.
|
|
| ▲ 전봉덕 /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 1910. 12.12.-1998. 5.18. 일제 강점기의 경찰 간부이며 대한민국의 군인, 변호사이다. 작가 전혜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 한국법학원) |
|
사실 나와 함께 고등시험에 합격한 자들 중에는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본부에서 근무하게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김해의 부읍장으로 발령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지방으로 밀어내는 것이 당시 총독부의 인사방침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영천으로 부임하였다. 그때 까지 큰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시골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면사무소의 건물을 보고 놀랄 정도였으니 할 말을 잊을 뿐이었다.
내 나이27세. 1943년 10월의 일이다. 이때부터 나의 취직 생활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영천읍의 동쪽에 자그마한 집 하나를 얻어서 처음으로 공무원 생활에 들어갔다. 그 때 영채는 4살, 영준은 생후 4개월 이었다. 우리가 그곳으로 자리를 정하자 동네 사람들은 구경삼아 모여 들었다. 제국대학을 나오고 고문을 두개씩이나 합격하였으니 별종인가 싶어 와서 보았다며 막상 보니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떠들어 댔다. 그리고 종내에는 순박한 그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한번은 군에서 면서기 시험을 시행한 일이 있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군청에서도 근무할 수가 있게 되므로 당시 시골에서는 상당히 비중이 큰 시험이었다. 내가 직접 문제를 내고 채점도 하고 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아까부터 어떤 노인이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인사를 나누고 연유를 묻자 노인은 대창면에 살고 있는 조 씨 성을 가진 사람인데 집안의 종손이 이번에 면서기 시험을 보았는데 게시판을 보니 떨어졌으니 방법이 없겠냐는 것이다. 내가 이미 끝난 일이라 도리가 없다고 말씀드리자, 노인은 말씨를 들으니 외지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예부터 영천에는 남조, 북정이라는 말이 있는데 외지에서 왔으니 알리가 있나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영천군의 남쪽에 있는 대창면에는 옛날 망기당 조한보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고 북쪽에 있는 신계면, 임고면에는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 그래서 남조북정(南曺北鄭)이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정몽주에 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었으나 조한보에 관해서는 당시의 나로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본래 조한보는 이조 초에 회제 이언적과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라는 과제를 놓고 서신으로 논쟁한 것으로 유명한 대학자였으며 그러한 관계로 총독부에서도 그 후손을 특별히 우대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사정을 외지에서 온 풋내기 관리가 모르고 있다는 꾸지람이었다.
그 다음날 대구에서 엄지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내가 직접 대창면으로 가서 조 씨 집안의 종손 한 사람만 시험을 실시하고 그리고는 합격을 시키고 오라는 지시였다. 일본인들의 양반 회유정책이 어느 정도인가를 엿볼 수 있는 국면이었다. 나는 기가 찼지만 도리가 없었다.
부하 직원 한 사람을 데리고 자전거를 타고 약 8km 거리에 있는 대창면 사무소로 가서 앞에 있는 계시판에 시험공고를 써 붙였다가 1분후에 그것을 떼버리고 시험을 치러온 그 종손을 만나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낸 다음 합격공고를 써 붙이게 하였다. 나도 오기가 난 것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면장도 미안하게 생각하였던지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하여 닭을 잡아 술대접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