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에서의 일들 (26회)

또 한 번은 부산에서 근무하는 대학 2년 후배인 박일경 군이 영주군청으로 나를 찾아와 한담을 하다가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임고면에 있는 이호 씨가 나를 찾아와서 새로 지은 저택에 점심초대를 하였다. 이 분은 당대의 거부 이인석 씨의 장남으로 영국 켐브리지대학에 가서 케인즈 교수로 부터 경제학을 배우고 돌아와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임고면의 자기 집에 파묻혀 있었다.

그의 동생 이활 씨는 평양에서 검사로 있었다. 영주에서는 자랑으로 삼는 명문 집안이었는데 임고면에 큰 저택을 짓고서 나를 점심에 초대한 것이다. 나는 궁전 같은 그 저택에 가서 점심을 잘 대접 받았다.

이호 씨는 광복 후 무역협회장과 고려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고 특히 내가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에는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김상협 씨를 임명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장관실을 찾아와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 분의 동생인 이활 씨는 그 후에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적십자사총재 등을 역임하였으며 나는 이분을 깍듯이 선배로서 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저택은 해방 후에 있은 10.1 폭동 때에 공산분자들에 의해 불타 버렸다.

▲ 이호(1914-1997) 조선총독부검사, 대검찰청검사, 육군법무감,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지냄

해를 넘겨 1944년 정초가 되었다. 나는 군청 직원들과 함께 부하 직원인 황 씨 집에 초대받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경상도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막걸리가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배가 불러서 마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집주인이 나에게 북쪽 사람은 술이 세다고 하는데 어찌 그리 술이 약하냐고 빈정댔다.

내가 술이 세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나는 지기가 싫었다. 평양에서는 소주를 주로 마시는데 막걸리는 배가 불러서 못 먹겠다고 했더니 황 씨는 비장해 두었던 안동소주 한 되들이 한 병을 들고 나왔다. 나는 그것을 병째 들고서 그냥 꿀꺽꿀꺽 마셨다. 절반 정도 마시자 그는 술병을 빼앗았다. 자기가 아끼던 술이라고 다 마시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 남은 술을 다 마셨다.

얼마 후에 우리들은 다른 직원의 집에서 계속해서 술을 마시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 나는 그런대로 비틀걸음으로 걸었으나, 황 씨는 문을 나서자마자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져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그 후 영천 군청내에서는 도모다(황 씨)가 술이 가장 센 사람인데 같이 술을 마시고도 황 씨는 쓰러졌는데 그 사람은 끄떡도 하지 않더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는 어떤 부하 직원이 나에게 질문을 하기를 제국대학을 나오고 고문을 두 개씩 이나 합격한 분인데 어째 국어(일본어)의 발음이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사실 경상도 사람의 일본말 억양은 일본 사람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이에 비하면 서울이나 평양 사람의 일본말은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엉뚱한 질문이 나왔던 것인데 나는 즉시 조선 사람이 일본말을 할 때 일본인과 똑 같을 수는 없고 조선사람 식으로 일본말을 해도 된다고 하면서 나는 국어라는 표현 대신에 분명히 일본말이라고 시정해서 대답해 주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역시 공부한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아무리 고문까지 합격하고 일본 관리가 되었지만 민족정신만은 잃지 않고 있더라는 말이 퍼져나갔다.

봄이 되자 지독한 보리고개(춘궁기)에 접어들었다. 본래 이 땅에서는 봄마다 식량이 떨어져 많은 농민이 북간도나 연해주(소련땅)로 떠나갔던 것인데 태평양전쟁 이후부터는 일본이 조선에서 쌀을 800만석이나 매년 가져갔기 때문에 식량부족의 현상은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에서는 농민들을 상대로 식량절약의 계몽운동을 펼치려고 매일 같이 독촉하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나도 할 수 없이 이 운동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임고면의 이인석씨의 큰 저택에서 작은 시내 건너편 쪽에 있는 우항동을 택하였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정몽주 선생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인 내무과장 엔도씨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일본인 과장이 나를 따라 왔다는 것은 감시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나는 부락민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식량 절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니 도무지 나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웃기는 말도 해 보았지만 그들은 누구 한사람 웃지 않았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내무과장 엔도 씨에게 말하였다.

“엔도씨, 당신은 경상도에서 자라났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경상도 사투리로 조선말을 할 줄 압니까?”

“예,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러면 내가 일본말로 이분들에게 말할 터이니 당신은 경상도 사투리로 통역해 주시요.”라고 하여 그날 저녁의 간담회는 웃지 못 할 해프닝 속에 무사히 끝났다.

끝난 다음에 엔도 씨는 나에게 그 정도로 조선말이 서로 안 통하느냐고 물었다. 조선 사람이 일본말로 말하고 일본사람이 그것을 조선말로 통역했다는 이 얘기는 한동안 이 고장의 화제 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봄이 가고 여름이 되자 큰딸 영채가 홍역을 앓았다. 그 애가 무사히 끝나고 나니 이번에는 장남 영준이가 또 홍역에 걸렸다. 그러나 영준의 홍역은 심상치가 않았다. 간신히 빨간 점이 나오는가 했더니 한약을 잘못 먹인 탓으로 순식간에 그것들이 모두 숨어들었고 이리하여 영준의 용태는 죽은 사람 그대로가 되었다. 나는 정신없이 군청 앞에 있는 의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데리고 왔다. 그는 주사 한대를 놓고 갔다.

영준은 곧 소생하였고 홍역도 그런대로 끝났지만 소독을 잘하지 않은 주사를 팔에 맞은 탓에 팔에서 고름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팔에 대한 외과수술은 하였지만 그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평양에서는 어머니까지 오셔서 간호를 하셨다. 황 씨 문중의 대를 이을 귀중한 사람이므로 영천과 평양에서 모두가 걱정하였다.

영준은 그 후 때때로 전신에 부스럼이 생겨 고생하였는데 일본 벱부 온천에서 만든 유황온천 분말을 더운 물에 타서 목욕을 시키면 회복되었다. 이 분말은 나중에 해방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서까지 쓸 만큼 많이 사서 가지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