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의 일로 정신이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전근명령이 떨어졌다. 영천의 북쪽에 있는 청송군의 농산과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전기도 들어가지 않는 산간 벽지였지만 나는 할 수 없이 8월 무더운 날 가족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부임하였다.
영천에서의 일은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군청의 일로 한때 포항까지 갔다 온 일이 있었으나 이에 관해서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평양에서 김원찬 군이 잠시 다니러 왔으므로 그를 데리고 경주에 가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구경시켜 준 일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삼총사의 한 사람으로 친하게 지냈던 김 군과 나의 만남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해방 후에 공산당원이 되어 남하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영천읍 앞을 흐르는 금호강에서는 낚시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강에서 잡은 고기를 날로 먹으면 간디스토마에 걸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천에는 황달병에 걸린 사람이 많이 있었다. 영천은 인심이 그리 후한 곳은 아니었다.
청송에서는 군청 앞 중심가에 일본식 주택을 한 채 얻어서 살림을 차렸다. 청송은 세종대왕비 심 씨가 출생한 곳이고 심비는 16남매를 출산하였으므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읍내를 흐르는 개천 옆에 기둥이 16개나 있는 웅장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청송읍은 깊은 산 속에 있는 고장이요 공기는 맑고 깨끗하였다. 그리고 2Km 가량 동북쪽으로 가면 효능이 좋은 약수터가 있었다. 지금은 이곳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으나 당시는 약물로 죽을 쑤어 파는 초가집이 두어채 있을 정도였다. 이곳으로 이사 오자 공기가 좋아서 인지 영준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청송에서는 도회의원 윤 씨와 군청의 면행정 담당 주임인 최송학 군이 특히 나를 따랐다. 윤 씨는 상민 계급이었으므로 그 곳 양반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었다. 그는 해방 후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까지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실의의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최 군은 나의 영향을 잘못 받아 해방 후에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와서 내가 반공임을 보고서 자신도 마음을 돌려 공산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같은 당원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아까운 청년이었다.
청송에 부임한 것은 여름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아 모두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리하여 하루는 밤에 군청 뒷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하여 기우제를 올렸다. 그 곳 유림들의 안내를 받아 가면서 제를 올렸지만 별로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장남의 건강을 위하여 퇴근 후에는 개천에 나가 낚시질을 하였다. 나는 물론 낚시 솜씨가 서툴렀지만 나를 따라 나선 부하직원은 솜씨가 대단하여 한 두 시간 사이에 300마리 이상을 잡았다. 그의 낚시 솜씨는 하나의 예술과도 같았다. 잡은 고기를 솥에 넣고 밤새도록 끓이고 나면 아침에는 한 공기 정도의 진국으로 쫄아 든다. 이것을 영준에게 먹이는 것인데 그것이 아마 효과가 있었는지 영준의 건강은 금방 좋아졌다.
읍에서 시내 물을 따라 아래로 조금 내려가면 덕천이라는 동네가 있고 그 곳에는 심 씨 문중의 어른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 분을 찾아가 부탁하기를 나의 할머니는 심 씨인데 이곳에 모셔져 있는 부원 심 씨는 나의 할머니의 조상도 되니 그 분의 묘 앞에 술 한 잔 올리고 싶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어느 날 나는 그 분의 안내로 묘소를 찾아가 술 한 잔 올리고, 그리고 배례하고 나왔다. 그 때에 나는 거기에 묻힌 분이 세종비 심 씨의 부친인 영의정 심온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묘역은 매우 초라했다는 인상이다.
이때에 그 덕천에는 이제 겨우 보통학교에 입학할 나이의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때에 그 소년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나중에 커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나의 연구실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심헌섭 군이다. 그는 지금 그의 모교인 법과대학에서 법철학과 형법을 강의하는 교수로 있다. 몸이 약한 것이 걱정이다.
가을이 되자 이곳 명륜당에서는 서울의 석존에 해당하는 제례가 거행되었다. 나는 군내의 유지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도회의원 윤 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곳의 유림들이 불참을 선언하고 나섰다. 윤 씨는 상민인데 상민과 함께 제례를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윤 씨는 도의원이요 따라서 군의 유지가 되는 사람이므로 나는 깊이 생각함이 없이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던 것인데 뜻밖에도 이러한 저항에 부딪힌 것이다. 윤 씨는 철저한 친일파로 보였으므로 양반들의 반일 감정이 이런 형식으로 폭발된 것 같이 느껴졌다.
청송 경찰서장인 고바야시가 나에게 뛰어와서 말하기를 유림들이 불참하면 큰일이니 윤 씨에 대한 초청을 철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최송학 군을 보내 윤 씨를 불러다 나의 고충을 말하였다. 윤 씨는 자기의 신분을 잘 아는지라 나의 권고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다음날 나는 명륜당에 가서 그 양반들을 눈 여겨 보니 모양새는 한결같이 보잘 것 없고 초라해 보였지만 그들의 기개만은 대단하였다. 지난날의 상놈이 일본사람의 앞잡이가 되어 거들먹거리는 것이 보기가 싫다는 것이며 그래서 더욱 더 반일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양반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지만 그러나 서글픈 심정은 가눌 수가 없었다.
하루는 청송면장을 데리고 부동면에 시찰을 나갔다. 심산계곡이라 농지가 부족한 탓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 구장의 집에 들어갔다. 점심밥으로 나온 것은 찬 보리밥을 김치로 무쳐서 데워온 것이었다. 그들의 생활 형편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면장은 숟가락도 들지 않았지만 나는 집 주인의 성의를 생각하여 그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들의 고통이 곧 우리 민족의 고통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집주인은 내가 밥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고 그나마 안심하는 눈치였다.
겨울이 되자 도지사가 바뀌었다. 엄 지사가 총독부 학무국장(지금의 문교부 장관)으로 영전하였고 그 자리에는 역시 평양사람인 이창근 씨가 온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 지사는 초도 순시 차 청송에 왔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그 분은 깜짝 놀라면서 어찌하여 자네 같은 사람이 여기에서 썩고 있는가 라고 말하고는 곧 대구 도청의 내무부 원호과로 발령을 낸 것이다.
나는 곧 대구로 가서 부임신고를 하고 동산병원 앞에 있는 추부자(추상엽씨의 부친으로 추상엽씨는 김규택 전 UNESCO 사무총장의 장인이다.)씨 소유의 집 한 채를 빌리고는 다시 가족을 데리러 청송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1944년의 연말이라 청송에서는 야단법석이었다. 군청의 상공계에서는 연말의 소주 배급을 전면 중단하고 그 모든 술을 나에 대한 송별연에 쓰기로 하였다.
또 축산계에서는 소 2마리를 잡아 술안주로 쓰게 하였다. 나는 이미 청송군을 떠난 몸이라 그들의 이러한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군청에 있는 조선인 직원 전부가 이집 저집을 몰려다니면서 연일 술을 마셔댔다. 나는 견디다 못해 집으로 달아나 숨어버렸지만 그들은 몰려 와서 집 구석구석을 뒤져 나를 찾아내 다시 끌고나가 술을 퍼 먹였다. 그 많은 술과 쇠고기가 다 없어질 때까지 우리들은 술을 마셨다. 항문에서 피가 날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곳 경찰서장 고바야시 씨는 인근 3개면 주민들에게 명령하여 한 가구당한 지개씩 장작을 가져다가 군청 앞 마당에 쌓아놓게 하였다. 그리고는 나더러 가져 갈만큼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한 트럭 분의 장작을 차에 싣고 대구로 가져갔고 이때에 가지고 간 장작을 해방이 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나의 이사짐은 2트럭이 되었다. 트럭이 오후에 청송읍을 출발하여 부남면에 이르자 그곳의 명문인 허 씨 집안의 어른이 직접 나와 나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였다.
그분은 숯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백탄 10가마를 트럭에 실어 주고는 젊은 분이 대구에 가면 언제 메주를 쑤겠냐면서 잘 쑤어진 메주까지 한가마를 실어 주었다. 대구에 가면 이런 것이 다 요긴하게 씌어질 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청송에 있을 때에 부남면장의 인사문제가 있었고 그 분은 허 씨 집안에서 면장을 내도록 해달라고 여러 차례 나를 찾아 왔었지만 나는 그 분의 청을 들어 주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그분은 떠나는 나를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것이다. 경상도 양반의 면모가 잘 들어나는 국면이라 하겠다. 그분은 그 후에도 한두 번 도청으로 나를 예방한 일이 있었다.
트럭은 한 밤중에 대구에 도착하여 1945년 초부터 우리 식구는 대구에서 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