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의 일들_1 (28회)

도청 원호과에서 하는 일은 근로 동원으로 남태평양에 끌려간 사람들의 유가족을 보살펴 주고 또한 광산촌에 위문단을 보내는 일이 주가 되었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가수 백년설 씨와 자주 만났다. 그를 포함한 위문단을 조직하여 광산지대에 보낼 때에는 항상 나는 그를 격려하기 위하여 금호관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그에 대한 여자들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백 씨는 그 후에 기독교의 한 교파의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병을 얻어 수술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믿는 교파의 교리에 따라 수혈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대구 동쪽에 동촌비행장이 있었다. 군에서 사용하던 곳인데 이 비행장을 확장하려고 그 옆에 있는 면사무소를 옮겨 달라는 요청이 군으로 부터 왔다. 그 실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나는 비행장에 가본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소년 항공병들의 숙소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16, 17세 정도의 어린 소위 신풍특공대(가미가제)라고 부르는 일본이 자랑하던 소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그 길로 폭탄을 싣고 가서 미국 군함을 들이 받아 자폭해 죽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주 절박한 시한생명의 사람들이었다.

그곳을 찾아간 우리들을 처다 보는 그들의 눈초리에서 한 마디로 부럽다는 느낌이었다. 정복자로서의 거만함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일본사람이고 우리는 조선 사람이었지만 종래의 일본인으로부터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야릇한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우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무척 온순하다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죄 없는 어린아이들, 아직 부모의 품안에서 응석을 부릴 이 어린 소년들을 강제로 사지로 몰아넣는 일본의 기성세대들이 몹쓸기만 하였다. 그때 이러한 광경을 본 나의 인상은 한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소년들은 그 후에 모두 소리 없이 꽃다운 삶을 불사르며 사라져갔을 것이다.

당시 나의 주된 일 중에는 원호과의 업무 외에 도지사의 술심부름을 하는 일도 들어 있었다. 고문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물론 자신이 맡은 일도 해야 하지만 윗 사람들의 사교행사에도 참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이창근 지사가 나에게 과업을 주기를 중구원 참의인 손영목 씨가 징용나간 사람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대구에 내려오니 모모한 인사들과 함께 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이다.

손 씨가 내려오는 명목은 징용나간 사람들의 가족을 방문하여 위로하는 것이므로 그 술값을 지불할 특별회계는 노무과에서 주관하게 된다. 이리하여 나는 노무과장을 찾아가 그가 관리하는 노무원호회 특별회계에서 술값을 지불해 달라고 교섭하여 그의 승락을 얻어냈다. 다음에는 면세과장을 찾아가 술 배급권을, 양곡과장한테는 쌀 배급권을, 그리고 축산과장과 수산과장에게서는 각각 쇠고기와 생선의 배급권을 얻어왔다. 그 다음에는 그 배급권들을 가지고 일본요정에 가서 주인과 교섭을 벌여야 했다. 그들은 우선 꼼꼼히 모든 배급권을 일일이 확인한 후 전쟁 말기라 술값이 제대로 지불될지를 까다롭게 챙겨본 후 어렵사리 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술자리에는 서울과 대구의 중구원 참의들 외에 일본인으로서는 내무부장과 경찰부장이 초청되었고 그리고 나는 말석에 앉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일본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들은 철저한 친일파들인데 전쟁 말기의 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조선말만을 사용하였다.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지만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참으로 용감하다고 느껴졌다.

▲ 일제강점기의 경북도청

이창근 지사는 앞장을 서서 한문의 운을 띄우고는 한시를 짓는 데에 열중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내무부장 구라시마와 경찰부장이 그 자리를 떠서 나가 버렸다. 이렇게 되니 그 자리에는 조선사람 만이 남게 되었고 여기에서는 온갖 소리가 다 오갔다. 시국에 관한 말이 노골적으로 튀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일본을 찬양하는 눈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친일파로서 부귀영화를 모두 누려 보았지만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보니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나오는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을 그들에게서 느꼈다. 다만 이창근 씨만은 특이하여 그분에게서 민족정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사의 술심부름을 할 때에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내무부장 구라시마 이따루는 총독부의 정보과장, 다시 말해 지금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다가 이리로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요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도청에는 소위 고등관 식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도지사와 각부의 부장, 과장 그리고 나 같은 고문합격자가 가서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사람들을 식당원이라 불렀다.

그런데 구라시마 부장은 식당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보위원회를 구성하여 식당원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직접 나와 당시의 정확한 전황을 알려 주었다. 신문에 보도되는 소위 대본당 발표에서는 진 싸움을 이겼다고 거짓 발표하였지만 이 자리에서는 솔직하게 전쟁에서 졌다고 정확히 알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이 위원회가 열리는 날에는 식당에 갔던 것이다.

정오가 될 무렵 청내방송으로 점심시간에 정보위원회를 소집하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우리들은 커다란 호기심을 가지고 식당에 모여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구라시마 부장이 발언을 시작하는데 그는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사실을 과감하게 폭로하였다. 동경의 대본당 발표는 모두 거짓말이고 일본은 지금 전쟁에 지고 있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듣는 우리들은 모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모두 걱정하는 표정이었고 조선 사람들은 한결 같이 올 것이 온다 라는 표정들이었다.

이러한 정보를 듣고 부서로 돌아오면 당시에 농무과에서 근무하던 최문환 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 분은 와세다 대학을 나왔으나 고문에는 합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당원이 될 수 없었으므로 궁금해 하는 그를 데리고 구석으로가 들은 대로 알려주면 무척 기뻐하면서 나의 손을 꼭 쥐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최 씨와 나는 그 후에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그가 나중에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에는 장남 영준과 경희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기도 하였다.

정보위원회는 일본이 패망하는 전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구라시마는 내일로서 천황폐하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발표할 것이며 이제 우리 정보위원회는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각자 몸조심하기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

일본이 항복한 며칠 후에 구라시마는 도청직원을 모두 강당에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 일본 사람은 배상금 지불에 온힘을 다 할 것이고, 다음 10년 동안은 경제건설에 주력할 것이며, 그 다음 10년 안에는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참으로 오만무례 한 말이었지만, 아직 일본의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사람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구라시마의 이 말은 아마 조선을 떠나는 모든 일본인들의 공통된 심정이었을 것이다.

▲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