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어 둘째 여동생 재옥이가 평양에서 내려왔다. 그는 대구에서 며칠 놀다가 영채를 데리고 평양으로 갔다. 그러나 영채를 보내고 나서 그의 어미는 매우 후회하였다. 대구역에서 기차에 올라타던 그 아이의 귀여운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아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달 가량 후에 나는 할 수 없이 휴가를 내어 평양으로 가서 영채를 데리고 오기로 하였다.
바로 그 무렵 선친께서는 서울에 오셔서 성북동에 있는 정원이 이만 평이 넘는 백인기씨의 별장을 구입하여 그 곳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내가 성북동을 찾은 것은 미국의 B29기가 동경을 폭격하여 일본 천황이 일본 열도가 망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나는 선친과 같이 최근의 전황에 관한 말을 하면서 집 구경을 하였다. 마치 궁궐을 보는 것 같이 커다란 저택이었다. 아랫채는 내가 애들과 함께 있을 곳이고 가운데 가옥은 선친께서 사실 집이며 웃 사랑채는 일본식 건물로서 손님을 맞을 때에 쓸 곳이라는 등 선친의 설명이 자상하시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서울에 올라와 사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에서 이러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라고 여러번 강조하시었다. 결과적인 일이지만 선친의 이 당시의 결단은 우리 모든 식구들을 공산 치하에서 벗어나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평양으로 내려가서 처갓집도 들러 보는 등 몇 군데를 돌아보고 나서 영채를 데리고 대구로 돌아왔다.
평양에는 그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곧 광복이 되었고 그리고는 6.25로 남북이 분단되고 말았다.
이창근 지사가 아침에 출근할 때에는 항상 말을 타고 왔다. 그런데 나는 미리 출근하여 있다가 이 지사가 말을 타고 와서 도청의 현관 앞에서 내리면 나는 그 말을 끌고 시내를 통과하여 경찰부 소관의 말 훈련장까지 타고 가서 그 훈련장을 몇 바퀴 돌고는 다시 도청으로 오면서 말 타는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대신 승마를 그만두고 말았다.
본청에서 정보위원회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보통 때는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서 식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도청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는데 집으로 가는 도중에 도살장이 있었다. 점심 먹으러 집에 갈 때 나는 원호과 사무실에 잔뜩 쌓여있는 원호표 한 장을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 갔다. 축산과 주임에게 미리 귀띰해 두었기 때문에 도살장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곱창과 고기들을 가득 채워서 나에게 주었다. 그것으로 우리는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고기국을 먹을 수 있었다. 전쟁 말기에 쇠고기를 먹는 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같지만 우리 식구는 이러한 편법으로 영양불량이 되지 않고 잘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이창근 지사는 일본 고문행정과 합격자 중 조선인 제1호였다. 일본 관료로서는 출세한 사람 중 한 분이었지만 그러나 조선인이라는 생각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하루는 이 지사와 대구 군관구사령관, 일본인 대구시장 그리고 내가 대구역 옆에 있는 공회당 옥상으로 올라갔다. 전쟁이 막바지에 도달하였으므로 경성과 평양은 소개지역으로 공고 되었지만 대구는 거기에서 빠져 있었다. 소개지구로 공고되면 미군기의 공습에 대비하여 시가지의 일부를 미리 헐어야 하는데 대구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구의 군관구사령관은 대구도 소개지구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우리들을 이 옥상에 불러 모은 것이다. 그는 대구가 비록 소개지구 공고에는 빠져 있으나 소개지구로 해달라는 도지사의 요청이 있으면 총독부에서 추가해서 공고할 것이라고 힘을 주어 강조하였다. 옆에 서있는 대구시장은 덮어놓고 맞장구를 치기만 하였다. 그들은 대구역 앞에 있는 도시의 중심부를 헐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지사는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B29에서 폭탄을 마구 떨어뜨린다고 다소의 공지를 만들어 보아 봤자 별 효과는 없을 것이고 도리어 민심만 흉흉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것은 미군기의 폭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고서 내린 판단이었으며 또한 그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 지사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제 다 진 싸움에 조선인을 더 이상 괴롭힐 수는 없다는 결의가 역력히 보였다.
군사령관과 일본인 시장은 이 지사를 설득시켜 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이 지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대구를 소개지구에서 뺀 것은 총독부에서 다 알아서 한 것인데 우리가 자진해서 추가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군관구사령관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면서 내려가 버렸고 시장은 그 뒤를 따라 가면서 전쟁에 져도 좋다는 말이라고 볼멘소리를 하였다. 이리하여 모두가 씁쓸한 심정으로 그 옥상을 내려왔다.
이때 나는 이 지사의 민족의식을 확실히 읽을 수가 있었고 며칠 후 이창근 씨는 지사직에서 물러나 서울에 있는 작은 공사의 사장이 되었고 그 후임으로 전라북도지사 김대우 씨가 영전되어 왔다. 부임해 온 김 지사는 역시 나와는 같은 고향이었다. 그런데 그 분은 별 반대 없이 대구경찰서 옆의 도로를 따라 남북으로 소개 지구를 정하고 넓다랗게 집들을 헐어 버렸다.
이창근 씨는 광복 후에 서울에서 살다가 6.25때에 북으로 납치되었다. 김대우 씨는 정치적 수완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광복 후에 한때 정계진출의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본인은 스스로 은인자중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