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의 일들_3 (30회)

봄이 다 지나간 어느 날 지인이 나를 찾아와서 아까운 청년 한 사람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대구의학전문학교를 막 졸업한 이광직이라는 청년에게 남태평양에 가는 징용영장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 끌려가면 살아서 못 돌아온다는 사실을 당시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이 군과 또 한 청년을 내 밑에서 일하는 임시고용원으로 채용하였다. 상사의 결재를 받아 정식으로 발령을 내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예산이 뒷 받침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봉급은 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두 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집안의 아들이었고 이 정도의 직장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시에는 커다란 신분보장이 되는 셈이었다.

그 두 청년은 매일 출근하여 내 옆에 앉아 있으면서 잔심부름이나 하면 되었고 이런 상태로 얼마를 지나고 나자 일본이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이광직 군은 나중에 공부를 더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고 또 박순천 여사의 사위가 되어 지금은 서울에서 외과의로 활약하고 있다. 이군의 동생인 남직군은 한국은행의 요직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씨 가문과 나는 이런 점에서 참으로 좋은 인연을 맺은 것이 된다.

여름이 다가오자 우리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매일 같이 미국 비행기가 부산항을 공습하였는데 부산에 공습경보가 울리면 대구에도 연이어 공습경보가 울려 퍼졌다. 미군기는 부산항에 있는 선박만을 공격하고 돌아갈 뿐 대구까지는 오지 않았고 일본에서 폭격할 때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민간 주택을 공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습경보가 내려지면 우리는 방의 불을 끄든가 두꺼운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야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둘째 아들 대유가 태어났다. 산모가 있는 방이라 전등을 켜도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해의 여름은 지독하게 더워 온 가족이 땀띠로 온몸을 뒤집어 쓸 지경이었다.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이런 고통은 계속되었다.

대유는 나중에 7세가 되어 1.4후퇴로 부산으로 피난 가 있을 때 어이없이 풍토병에 걸려 속절없이 잃고 말았다. 그는 출산 때에도 이처럼 평탄하지가 않았다. 그 해의 대구의 더위는 필리핀을 다녀 온 일본의 종군작가 말을 빌리면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와 같았다고 하였다.

8월 중순이 되자 내무부장 구라시마가 정보위의 식당원들에게 일본의 항복을 미리 알려 주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8월 15일 정오에 있으리라는 것까지 알려 주었다. 그런데 마침 8월 15일 아침에 나의 대학 1년 후배인 김대훈 군이 도청으로 나를 찾아왔다. 김대우 지사에게 부탁하여 직장을 구하러 왔다는 것이다.

오늘 일본이 항복을 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말한 나는 김 군과 같이 그날 정오까지 기다렸다가 도청 수위실에 가서 일본 천황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일본인들이 있는 곳이라 우리들은 환성을 올리지는 못하고 뿔뿔이 어디론가 모여서 말 꽃을 피울 뿐이었다. 김 군과 나는 그날 저녁에 우리 집에서 축하주를 마셨다.

다음날 도청에 출근하자 모두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여기저기에 모여앉아 앞으로의 일들을 궁리 하였다. 특히 전날 밤에 남산에서 오래 동안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일본인들이 아마도 기밀문서를 태웠을 것이라고 숙덕거렸다.

그런데 밖에서는 이미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가 결성되었다. 여운형씨가 서울에서 이 위원회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곧 대구에도 벌써 그 지부가 세워진 것이다. 우리들은 가슴 벅찬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 단체의 지부장으로 추대될 예정이던 서상일 씨가 건준을 반대하고 나섰다. 공산주의자들과는 일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당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앞줄 가운데) 위원장을 환호하는 시민들

지금 생각하니 서 씨의 선견지명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건준 내부의 분열이라고 보았으므로 그저 실망하는 마음만을 가질 뿐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였다. 대구에서는 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급히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심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대구에 퍼져있던 소문에 따르면 북쪽에는 소련군, 중부에는 미군 그리고 남쪽에는 호주군이 진주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북쪽으로 처 들어온 소련군이 약탈과 강간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대구에 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로서 흉악범들을 유배시키던 곳이며 따라서 그들의 후손인 호주군도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약탈과 강간을 자행할 것이라는 우려가 이곳에도 퍼져 있었다. 해방의 기쁨은 순식간에 예측할 수 없는 공포로 변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이미 서울에 올라와 있어서 나도 내 식구를 데리고 빨리 서울로 가서 합류하는 것이 마음 편한 처사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급하게 철도국 직원에게 교섭하여 화물 한 칸을 빌려 이삿짐을 모두 싣고 그리고 트렁크 2개만 들고 일반열차로 서울로 올라갔다. 일반 행정사무에서 총독부는 이미 손을 뗐고 그리고 미군은 아직 진주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평상시와 같이 생각하고 이렇게 일처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 와보니 이삿짐은 온데 간데가 없었다.

어디 가서 호소할 데도 없이 이 혼란기를 틈타 이삿짐이 통째로 증발한 것이다. 아내가 그때까지 아끼며 모아 두었던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우리 가족의 귀중한 사진 앨범까지 모두 없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식구는 빈 털털이가 된 채로 성북동에 계신 가족들과 합류하여 서울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