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서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아랫채를 차지하였고 내 식구들은 가운데 사랑을 썼다. 앞에 있는 서재에는 부원군 윤덕영 씨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1만권 가량의 하사본을 돈을 주고 사다가 진열해 놓았는데 이곳은 응접실로도 사용하였다. 가운데 사랑에서 물길을 따라 150m가량 올라가면 수각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여기에서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그 위로 더 올라가면 일본식으로 지은 윗채가 있는데 이곳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이 성북동 집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월 말부터였으며 이곳에서의 2년 동안은 우리 집안의 격심한 파란을 겪는 시기가 된다.
성북동에서 나는 매일 시내로 나가 보았다. 광복이 되었다고 맨날 시가행렬이 계속되었는데 그것들을 구경하는 것이 하나의 재미였고 또 거리에 나붙은 각종 벽보를 보며 다니는 것도 꽤나 흥미 거리였는데 그러면서 당시 정국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미군이 진주하여 총독부 안에서 아베총독의 항복을 받고 중앙청에 걸려있던 일장기를 내리는 장면을 경기도청(지금의 치안본부)앞에서 보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을 구경하고 다니다가 적당히 점심을 사먹고 다방 몇 군데를 들려보고 저녁에 성북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선친께서는 장진섭씨와 합작하여 일본의 미쯔비시로부터 반도호텔을 35만원에 사들였다. 매매 일자는 다소 소급하였으나 잔금 5만원을 마저 지불하기 전에 일본인들은 떠나가 버렸다. 그런데 미군이 진주하자 그들은 반도호텔을 그들의 사령부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임대료를 지불하고 건물 전부를 쓰기로 하였고 건물의 관리는 그 대신 우리가 맡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선친은 지하실에 관리사무소를 설치하고 매일 그곳에 나가 계셨다. 그리고 이 사무실은 미국에서 돌아온 교포들의 대기소처럼 사용되었다. 정치목적이나 이권운동 때문에 미군 사령부를 찾는 귀환 동포들은 여기에 모여서 여러 가지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히 선친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고 또한 나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얼마 후 나는 선친의 사무실을 찾아 온 지인의 소개로 성동구청장의 발령을 받았다. 1945년 9월의 일이었다. 성동구청은 지금의 무학여고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이곳의 구청장으로 취임하자 처음 주어진 과제가 일제하에서 징용에 끌려갔던 성동구 주민들 일부가 이 구청을 습격한 일로 모두 구속 된 것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들은 성동 경찰서에 구속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우선 그곳의 서장을 찾아 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서장은 바로 나와 고문 동기생인 이희상 군이었다.(이 서장은 이천상 씨의 동생으로 나중에 종로경찰서장으로 있다가 6.25때에 납북되었다.)
나는 이 서장에게 말하기를 구청을 습격한 것은 일본이 미워서이고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므로 석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이 서장은 곧 그들을 풀어 주었다. 그 며칠 후에 시청에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서울 시청의 미군 고문관실에 가니 스탈링이라는 장교가 와서 나에게 파면선고를 하고 나갔다. 구청장에 취임 한지 1개월도 못되어 나는 파면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청년들을 구출해 냈기 때문에 조금도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얼마 후에 구청 회계과 직원이 성북동집으로 와서 한 달 분 봉급 500원을 주고 갔다.
그 후 곧 나는 반도호텔의 지하실 사무소를 찾은 어떤 지인의 소개로 미군정청에 취직하게 되었다. 보건위생부(Department of Public Health and Welfare)의 법제관(Legal Adviser)에 임명되었는데 여기의 한국인 부장은 이용설 박사였고 그리고 나와 함께 일하는 미군 장교는 와이즈만 대위로 우리가 쓰던 방은 지금의 국립 중앙박물관의 서쪽 3층에 있었다.
1945년 11월의 일이었다. 미군정청에 취직한지 얼마 안 돼 모스크바 외상회담이 열렸고 여기에서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은 우리 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형언할 수 없는 울분 속에서 미군정청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 전원이 중앙청 뒷마당에 모였다. 우리에게 독립을 준다고 하기에 우리들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것이지 신탁통치를 돕기 위하여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우리들은 곧 강력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고서 그 자리에서 기초위원 5명을 선출하였다. 그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으나 나머지 4명은 모두 공산당원 같은 말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공산당원들이 더 맹렬히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초안을 작성하라고 미루었고 나는 붓을 들어 성명문을 작성하였다. 나머지 4명은 모두 수정하지 않고 동의하였으므로 그 문안을 가지고 다시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 나아가 그것을 낭독하여 그대로 확정지었다. 그것이 바로 미군정청 조선인 직원 신탁통치 반대성명서라는 긴 제목의 글이었으며 이것은 그날 모든 국내 일간지에 발표되었다.
특히 공산당 기관지인 조선인민보에서는 제1면 톱기사로 게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반탁성명서의 제1호가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북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공산당이 찬탁으로 돌변하였으므로 남측 민족진영만이 계속해서 반탁으로 일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기록에 소상히 남아있는 것과 같다.
해를 넘겨 1946년이 되자 보건후생부는 중앙청에서 지금의 을지로 사거리 동남쪽에 있는 화월식당 자리로 옮겨갔다.(이 건물은 최근에 헐렸고 지금은 도로가 되었다.) 동시에 나의 파트너였던 와이즈만 대위는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 그리고 심경숙이라는 타이피스트 등 세 명이 근무하였다. 미국인들이 처음에 나에게 요구한 것은 보건행정을 경찰로부터 독립시키는 제도를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경찰이 보건행정까지 맡아서 하는 나라는 일본과 이태리뿐이므로 하루 빨리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건관리를 양성해야 하는데 그것이 시일이 걸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들의 독촉이 심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나는 그들이 하라는 대로하였다.
이리하여 보건행정을 경찰로부터 분리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할 보건관리를 양성하는 일에는 아직 손도 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태에 있을 때에 콜레라 환자를 태운 외항선이 부산항에 들어왔다. 검역과정에서 조선인 의사는 콜레라 환자라고 판정을 내렸으나 미국인 군의는 단순한 식중독일 뿐이라고 우겨댔다. 고기를 많이 먹는 미국인들 중에도 이런 증상의 환자가 많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 외항선의 승무원은 모두 상륙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진성인 콜레라 환자였고 드디어 콜레라가 부산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고 수만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수백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생겨났다. 보건관리는 아직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권한을 빼앗긴 경찰은 그저 방관하기만 하였으므로 전국적으로 그 병이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왜 그때 내가 좀 더 고집을 부려서 미리 예방하지 못했는가라는 후회가 없지도 않았으나 미국 사람들이 전권을 쥐고 있던 때였으므로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이 사건을 거울삼아 무지하고 힘없는 민족이 어떠한 희생을 당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교훈으로 되새겨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