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보스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관식에 참석한 다음, 나는 레지던트로 있었던 보스톤의 터프츠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옛날 친구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여기저기서 식사초대가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병원 측에서는 예전에 내가 사용하던 기숙사 방을 내주면서, 레지던트 수준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병원 식당도 레지던트 때처럼 무료였다.
나는 예전에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중국집 민중판점을 먼저 들렀다. 보스턴을 떠난지 3년 6개월만이었다. 나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선물할 인삼상자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꼭 그에게 인삼을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그의 후임으로 일하는 새로운 주인에게 선물을 전해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보스톤의 하늘은 조금씩 빗줄기를 뿌리고 있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그 주인장이 저만치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향해서 따뜻한 미소를 빙그레 짓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갑자기 보스턴이 나의 제2의 고향처럼 푸근하게 느껴졌다.
아, 보스톤!
재미있는 지옥이냐, 재미없는 천국이냐
이제 진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3년 전, 한국으로 나갈 때 2년 이상 외국생활을 하고 미국에 돌아오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으나 나는 이미 그 자격을 획득한 셈이었다. 게다가 서울에서는 동료교수들이 날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보스턴에서는 오랜만에 방문했는데도 이렇게 따뜻한 대접을 해주고 있으니, 과연 어느 곳에 영주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매일같이 이민올 것인가, 서울로 돌아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그 와중에도 혹시 미국에 아예 정착할 경우를 생각해서 몇 군데 병원을 알아보았다. 그때 내가 있던 병원의 러시아계 외과의사 솔로프(Solof)는 면역에 대한 연구를 위해 개를 가지고 실험하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의 인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 하자 솔로프는 펄쩍 뛰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나와 함께 여기서 일하지 어딜 가려고 해?”
한번은 당시 보편화되기 시작한 신장이식수술을 매우 활동적으로 하고 있는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메디칼 칼리지 오브 버지니아병원(MOV)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나는 우연히 나보다 3년 선배인 이형모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마침 그날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장이 하는 신장이식수술을 이형모 선생이 도와주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수술실에서 이식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견학할 수 있었다. 흄은 손놀림이 좋았다.
그는 수술을 마치고 나를 연구실로 데려가 제안했다.
“닥터 민이 유능하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지. 가족들을 다 데리고 와요. 충분한 대우를 해주겠소.”
“감사합니다. 저도 이식수술에 흥미가 있습니다.”
“잘 됐어. 우리 함께 일 하는 거야.”
흄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날 저녁은 이형모 선생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서 식사를 나눴다. 그런데 원래 서글서글한 성격인 그가 식사를 하는 내내 나더러 그 병원에 오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흄의 제안에 응했다가는 이 선생에게 폐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는 스타즐(Starzl) 교수가 간 이식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덴버로 날아갔다. 덴버는 그 옛날 미국에 온 처음 1년 동안 인턴생활을 한 곳이었기 때문에 감개가 무량했다. 콜로라도 대학병원의 스타즐 교수는 40대의 젊은 교수였는데, 개를 가지고 간 이식을 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손재간이 자유자재인 의사였다.
스타즐 교수도 나를 붙잡았다.
“교수인 내가 하면 개가 살고, 조수가 하면 죽더군. 자네가 여기서 나와 함께 일했으면 해.”
일단 개의 간이식 과정을 배웠다. 나는 자꾸만 마음이 기울어갔지만 그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보스턴에 가서 상의해 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당신이 오겠다고 말만하면 비행기표를 끊어주겠어. 평생이 달린 문제니까 결정은 당신이 해.”
‘이토록 미국에서 나를 붙잡고, 한국에서는 사사건건 나를 소외시키는 분위기인데 뭘 망설이는 거지?’
나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졌지만 답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내 인생만 갖고 생각해보았다. 인생을 경제, 명예, 레저의 비율로 나눈 다음 스스로 비교 채점을 해봤다. 미국에 있을 때가 68점, 한국에 있을 때가 67점으로 나왔다.
편두통 발작은 처음에는 메스껍다가 욱신거릴 듯한 통증이 시작되면서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르곤 한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편두통이 발작하기 시작하면 배속이 메슥거리면서 우울한 기분이 들어, 3층 방에서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다. 몇 번 경험한 끝에 다음부터는 편두통이 올 기미를 느끼는 순간 지체 없이 샤워실로 달려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그러면 편두통 증세가 일시적으로 가라앉곤 했다.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사람이 몹시 우울해지면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 이었다. 언젠가 나의 동료 레지던트였던 신경과 조교수 닥터 힐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는 즉석에서 나를 철장으로 된 입원실에 가두었다.
“편두통이 나아질 때까지 푹 쉬어. 안전해질 때까지.”
입원치료를 받고나자 편두통 증세가 어느 정도 호전되었다.
그토록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으면서도 결론이 나지 않자 이번에 삶의 질을 비교해보았다. 일상생활을 즐기는데에 서울은 재미있는 지옥이었고,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의외로 빠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나라는 인간은 인생이 재미있어야 살맛이 나는 족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