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인심
아침 미사를 마치고 사제관에 오면 현관 앞에 먹을 찬거리들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웃에서 미사오실 때 할머니들이 갖다 놓으신 선물이었다. 김치에서부터 고추장, 된장, 간장, 참기름, 고구마줄기 김치, 손두부, 콩자반, 내가 좋아하는 고들빼기 김치, 깻잎김치까지 셀 수 없을 만큼 풍성했다.
그들은 그릇을 찾으러 오는 일도 없다. 본당 없이 혼자 지내는 것이 안쓰러워 정 많은 할머니들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이었다. 나는 보답으로 호박죽을 끓여 이웃에게 돌렸다. 이렇게라도 하고나니 마음이 편했다. 지금쯤은 그 할머니들이 거의 하늘 길을 떠났을 것이다. 주여,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아멘!
주님봉헌 축일
주님봉헌 축일은 성탄 후 40일째 되는 날로서 성모마리아님께서 법대로 정결예식을 치루기 위해서 아기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날이다. 교회는 이날을 기념하여 봉헌 축일로 정하고 있다. 이날 초 축성식도 있다.
우리 교회에서는 촛불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촛불을 자기 몸을 태우면서 이웃의 어둠을 밝혀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이날 사제서품이나 수도자허원식을 많이 한다. 내가 있는 수녀원에서도 이날 미사 때 봉헌 서약식이 있었다.
나는 미사 강론 때 촛불과 수도자의 삶의 공통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촛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감격의 눈물이다. 그렇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촛불과 같은 감격의 삶이어야 한다.
촛불
재단 위에 촛불이 활활 타고 있다
세상을 태우고 자신도 태우고
촛불
촛불은 자기를 태우면서 행복해 한다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면서
촛불
촛불은 뜨거운 눈물만큼이나
사랑하며 죽어가고 있다
나도 촛불로 살고 싶다
청춘을 불사르며
- 시집 <세월이 지나간 자리> 중에서
2003년 원평성당
수녀원에서 1년간 살다가 김제 원평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다. 내가 살았던 원평성당은 대지가 4천 평이 넘는 넉넉한 땅을 가지고 있다. 성당과 사제관 그리고 수녀원과 유치원으로 사용하고도 여유가 있어 사제관 뜰에는 잔디가 깔려있고 앞쪽에는 성모상이 잘 꾸며져 있다.
성당 뒤편 약 2천 평 정도에는 배나무와 매실나무가 있는 과수원이 있다. 그래서 3월에는 매화 향기가, 4월에는 배꽃 향기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모습이 좋아 배밭 주위에서 서성거리다가 옷이 눅눅해진 줄도 모르고 이화에 취하고 월백에 반해서 학창시절에 배워두었던 시 한 구절을 독백해본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리마는 다정(多情)도 병(炳)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주일 미사참례자 수는 약 3백 명 정도였고 분위기는 참 좋았다. 멀리 있는 신자들은 유치원 버스로 모셔오고 모셔다 드렸다.
주로 어르신들이 많아 성당에 몇 개의 신심단체 외에는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하지만 신자들의 친교는 좋았으며, 미사 시간에 강론 경청도 아주 진지했다. 나는 이런 모습이 좋아 주일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리고 어려운 살림에도 본당 운영에 수고해주신 본당 사목위원들과 최석기(아오스딩) 본당 회장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서울 한강본당, 유치원 후원 중단
원평성당은 본당 재정이 어려워 서울 한강성당에서 해마다 유치원 운영비로 1천만 원씩을 도움 받았다. 그래서 유치원 차도 사고 운영에 큰 보탬이 되었다. 첫 수확한 배와 매실을 한강성당에 답례로 보내곤 했다.
이렇게 좋은 관계가 얼마동안 유지되었는데, 몇 년 전부터 도움이 끊겨 유치원 운영이 어려워 얼마 전 문을 닫았다는 말을 들었다 .교구에서도 노력했으나 그곳 원아 모집 상황이 너무 저조해 그리된 것이라 생각된다. 꼬마 병아리들은 이곳 성당에서 볼 수 없고, 병설 유치원에서만 볼 수 있다. 어디서든 잘 자라주기를 바란다.
배장사
원평성당은 가을만 되면 신자들의 일손이 바쁘다. 성당 뒤쪽의 배를 수확해서 추석을 전후해서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당신부는 아는 성당 신부들에게 전화로 판매를 했다. 해마다 부탁하는 것이라 미안하기도 했다. 어떤 신부는 쾌히 승낙을 하고 어떤 신부는 부담을 가진 곳도 있어 가을만 되면 본당 신부는 배 판매로 마음이 쓰였다. 이렇게 해봐야 겨우 천만 원 정도의 수입이다. 작은 본당에서는 이것도 큰 보탬이 된다.
가을에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많은 손길이 요구된다. 특별히 이곳은 사목회에 배밭분과가 있어서 관리에서 수확 그리고 판로까지의 과정에서 본당 사무장 문재용(안드레아)과 배밭분과장 서만식(다미아노)의 수고가 많았다.
내가 그곳을 떠나 금암성당에 있을 때는 성의껏 배를 팔아주었다. 그리고 일찍 추수한 매실주는 사제관 옆방에서 향기를 내며 익어갔다. 배맛도 일품이요, 매실주 익어가는 냄새도 끝내주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다.
내가 그곳에 있을 때 글라라수녀원 생활을 정리해둔 글로 <삶에는 연습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수필집을 발간했다. 수녀원 생활의 행복과 은혜로운 생활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기분이 우울할 때 이 책을 읽으면 은혜로웠던 생활이 떠올라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