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후생부 법제관 근무 (32회)

여기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의사법, 치의사법, 약사법, 간호학교법 등을 만들었다. 의사법을 만들기 전에 먼저 나는 미국인의 권고에 따라 의학위원회(Medical Board)를 조직하어 백인제(6.25때 납북), 윤일선등 저명한 의학박사 10여명을 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이와 같이 위원회를 구성하여 어떤 작업을 추진해 나가는 방식은 미국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나는 그 분들로부터 의사법의 제정에 관한 의학계의 요망사항을 청취하였고 그것들을 토대로 의사법을 기초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우리나라 의사법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치의사법도 만들었다. 그리고 약사법의 제정도 이런 방식으로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위원으로 나온 분들은 한결같이 의, 약의 분리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환자를 치료한 의사가 직접 약을 지어줄 수는 없고 의사의 처방을 가지고 약국에 가면 그 때에 약사가 약을 조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러하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 실정으로 보아 그것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그분들과 나 사이에는 오랫동안 논의가 계속되다가 결국 절충 끝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의,약 분리는 원칙으로 하되 당분간은 종전대로 한다는 단서를 붙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당분간이 그 후 한정 없이 계속되어 의.약 분리의 문제는 40여년이 지나간 오늘에 이르도록 내가 그 당시 정해 놓은 선에서 일보도 더 전진하지 못한 채 종전 상태에서 맴돌고 있다. 정부에서는 한때 목포지방에 한해서 시험 삼아 이 원칙을 실시해 보려고 하였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이만큼 사정이 다른 것이다.

하루는 루카라는 27세의 예쁜 여자 장교가 내 방을 찾아왔다. 자기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아주 훌륭한 간호원 양성학교를 발전시킨 공로로 최고 훈장을 받은 사람으로 이 훈장은 이번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운 장군들도 받기 힘든 것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처럼 훌륭한 간호학교를 만들려고 하니 이것에 관한 법령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얼굴이 예쁘게 생긴 만큼 허세도 또한 대단하였다.

며칠 후 루카대위는 타이프로 찍어서 60매 가량이나 되는 초안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 밤늦도록 검토하였다. 지극히 자세하게 규정한 것인데 예를 들면 학생들은 조용하게 복도를 걸어가야 한다 라는 따위의 규정도 들어 있었다.

다음날 나는 루카대위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초안을 읽어보니 여학생이 이 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의 생활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지만, 그러나 이 내용만으로는 법령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대위를 보고 나는 심양을 비키라고 한 뒤 그 자리에 앉아 타이프를 쳐내려 갔다. 전문 5조를 다 찍으니 역시 반장으로써 충분하였다. 그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의 초안과 나의 초안을 가지고 부장실로 가서 결판을 내자고 제안하였다.

▲ 1955년 서울 을지로 입구 보건사회부 청사 / 1945년 위생국에서 보건후생국을 거쳐 1946년 보건후생부로 1955년 보건사회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용설 부장은 웬만하면 하자는 대로 하지 왜 고집부리냐고 나를 나무랬으나 미국인 부장(대령)은 나에게 한국의 법률가라고 묻고는 그렇다고 대답하자 루카대위에게 이 법령은 한국에서 쓸 것이니 한국의 법률가 말대로 따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고등간호학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의 각종 간호학교의 모체가 된 것이다.

이렇게 각종 위원회를 조직하여 보건에 관한 법령들을 만들다 보니 나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알려진 많은 의사, 치의사, 약사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대부분 나중에 서울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므로 내가 법과대학의 교수가 되자 그 분들과는 구면이 되었다. 아주 훌륭한 분들이었다.

보건후생부의 의무국에는 예방의학과가 있었는데 김용태 박사가 과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매일 나를 찾아와 예방의학과를 국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졸라댔다. 때로 그는 예방의학국도 부족하니 예방의학부로 독립시켜야 된다고 까지 말하였다. 나는 웃으면서 차라리 예방의학 국가를 세우라고 놀려준 일도 있었다. 병에 걸리기 전에 미리 예방하면 병에 걸린 다음에 치료 하는것 보다 비용이 덜 들고 고통도 덜 하다는 것인데 그의 주장은 백번 옳은 말이었다. 다만 일반의 인식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 하다는 것이 내가 주저하는 이유였지만 김 박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국 나는 그 과를 국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대병투쟁이 사후치료에서 사전예방으로 그 방향을 전향시켜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박사는 이 방면에서 선각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나는 그 분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우리의 법학도 지금까지의 치료 법학에서 예방 법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점은 특히 민사문제에 있어서 중대한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소위 예방법학을 강조하는 법학자를 나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2년 후에 내가 고려대학교 법학교수가 된 다음에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하였으나 얼마 후에 6.25사변이 터지는 바람에 그것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끝내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결국 나는 그것을 나의 법철학 이론의 소위 민강설에 흡수시켜 하나의 커다란 사상체계로 발전시켰다. 그러한 점에서 김 박사는 나의 큰 은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는 동안에 1946년 여름이 되었고 성북동에서 동생들과의 잦은 의견 충돌로 나는 크게 격분하였는데 이로 인해 나중에 큰 병의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서울에서의 생활이 싫어지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때에 평양으로부터 유혹이 왔다. 나의 평양고등보통학교 4년 선배인 윤두성이 경도제국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평양에서 활약하면서 때마침 설립하기로 예정된 김일성대학의 교수진을 초빙하기 위하여 서울에 온 것이다.

물론 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이 싫어졌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의 권고에 반승락을 해 두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의 오른쪽 다리의 무릎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점점 보행이 거북하게 되었는데 평양으로 가려면 적어도 38도선까지는 걸어가야 하므로 평양행의 반승락은 자연히 백지화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