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극장 화재사건 (35화)

예술은 전적으로 관객을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행정도 그 행위 자체는 예술가를 돕는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관객에 대한 고차원적인 서비스인 셈이다.

전에는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로 예술 행정을 펴나갔다. 즉, 무대를 만들어놓고 공연을 하여 관객들에게 예술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예술행정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예술가보다 관객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세종문화회관 총감독으로 부임하고 나서 직원들에게 특히 관객에 대한 서비스 개선을 강조하였다. 생필품을 만드는 제조회사에서 ‘고객이 왕’이라고 말 하는 것처럼 예술도 ‘관객이 왕’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2001년 1월 18일 3시 30분 경 나는 사무실에 앉아 음악평론가인 한상우 운영위원과 같이 세종문화회관 중장기 플랜에 대한 타당성 검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에 설치된 대극장 폐쇄회로 화면에 이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당시 대극장에서는 MBC에서 주관하는 악극 ‘애수의 소야곡’이 공연되고 있었는데, 공연 도중 무대 상단에 설치된 조명장비와 무대막 사이에서 작은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언뜻 목격한 것이다.

종합구성물의 경우 극적 효과를 살리기 위하여 간혹 불꽃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수많은 공연장 무대를 봤던 내 경험으로 판단할 때 그것은 공연 사고였다.

“조명장비 과열로 인한 화제가 분명한 것 같다!”
한상우 씨도 얼핏 폐쇄회로 화면을 보고 말했다.
“불이야!”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극장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사무실과 무대의 거리는 불과 100여 미터의 짧은 거리였지만, 복도를 달려가는 내게는 그 거리가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을 달려가면서 머릿속에서는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관객을 살려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한참 공연을 하고 있을 수많은 관객들이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공연장 전기가 나가고, 어둠 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맡으며 갈팡질팡할 관객들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었다.

‘제발 화재만 나지 말아다오.’

나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며 대극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순간, 내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예상대로 불이 대극장 무대막으로 옮겨 붙어 타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회관 방재팀이 신속하게 소화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나로서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관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라!”
나는 화재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악극의 특성상 대부분의 관객들이 노년층이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노인들을 부축하라고 외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잠시 후 화재신고를 받고 달려온 종로소방서의 물대포가 위력을 과시하면서 화재는 진화되었다. 대형 화재로 번질 수도 있었는데, 일찍 화재를 발견하는 바람에 초반에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무대와 객석 [출처 ; 세종문화회관]

천만다행으로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나지 않았다. 화재 소식은 빨라서 어느 새 언론사 기자들이 달려와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1972년 시민회관 화재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현장 브리핑을 준비하시오.”

나는 홍보부장에게 기자들을 위한 현장브리핑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재사건을 본 내가 직접 자세한 설명을 하려는 것이었다. 기자들에게 정확하게 사건을 알려주지 않을 경우 오보가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예술의 전당 사장시절 언론의 오보로 고통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화재의 원인은 외부 조명업체에서 설치한 조명기기가 과열되어 대극장 무대막으로 번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피해복구와 향후 안전대책에 대해서는 자체 사고대책반을 긴급 구성하여 추진해나가겠습니다.”

현장 기자회견을 마친 후 나는 그 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기자들이 가고 나자 이번에는 뒤늦게 소방관계자들이 들이닥쳐 사고원인을 캐물었다.

“당신은 뭐야?”
소방서 관계자가 물었다.

“총감독입니다.”
나는 무심코 말했다.

“총감독 말고 사장 오라고 그래!”
소방서관계자는 아주 강압적인 자세로 말했다.

“이 분이 사장님입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사장을 총감독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내 옆에 서있던 직원이 설명을 하였다.

“아, 그러십니까?”
소방서 관계자는 갑자기 태도가 변하여 내게 허리를 굽혔다.

사고 원인을 밝혀낸 후 소방서관계자가 가고 나서 나는 피해정도를 알아보았다. 다행히도 대극장 무대막이 불에 타버린 것 외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이 무대막은 1978년 개관 당시 일본 무대면막 제작 전문회사인 ‘마르쇼’사 제품으로 20년 이상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상 제 수명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물대포로 쏘아올린 물 때문에 회전무대와 오케스트라 피트를 비롯하여 무대기계를 작동시키는 많은 장비가 물속에 잠겨버린 것이었다. 전 직원이 매달려 급히 물을 퍼 올리고 무대장비 모두를 해체하여 부속품 하나하나를 건조시키는 일에 착수하였다.

일단 기계에 물이 묻었기 때문에 녹이 슬지 않게 윤활제를 입힌 후 다시 조립하는 등 밤을 새워 작업을 강행하였다. 다음날 공연 전까지 복구를 완료하지 못하면 티켓을 예매한 관객들이 보상을 요구할 것은 물론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기관으로서의 위상에도 흠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철야작업도 불사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다음날 공연 한 시간 전까지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