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접어들면서 아픔은 견딜 수 없게 되었고 무릎 속에 물이 고여 크게 부풀어 올랐다.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로 하였는데 대학예과 1년 후배인 정언모군(6.25때에 월북)이 주치의였다. 그러나 그의 치료를 3개월이나 받았지만 도무지 효과가 없었다.
그는 드디어 내 다리를 무릎 위에서 자르자고 제안해 왔다. 내가 부자라면 이런 상태로 평생을 살아도 되겠지만 나가서 활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다리를 자르고 목발로 다니도록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장남이라 내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으니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상의해 보겠다고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집에서는 야단이 났고 모두 다 비탄에 빠져있는데 때마침 선친의 친구 되시는 분의 부인이 성북동에 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서 신설동에 용한 한의사가 있는데 그를 한번 찾아가 보라고 말씀하였다.
아내는 즉시 신설동의 한의사를 찾아갔고 90이 넘은 노인의 방에는 고종황제의 시의로 있을 당시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내가 방에 들어가니 그분은 회중시계를 꺼내 보더니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계산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분은 소위 육효점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찾아온 까닭을 대충 듣고 나서 말씀하시길 ‘서양의학은 2,000년이나 동양의학은 5,000년이다. 요새 젊은 것들이 서양 것만을 좋다하고 동양 것은 무시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다리는 왜 잘라. 좀 더 일찍 왔으면 5첩이면 되었을 것을 2제(20첩)나 먹어야 되겠구나 라며 말씨를 들어 보니 38따라지(이북에서 피난해온 사람)인데 돈도 없는 사람에게 약을 비싸게 팔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용한 한의사 덕분에 다리를 자르지 않고 치유
그리고는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서 환자를 보아야겠다. 점괘를 보니 보통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렇게나 치료할 수야 없다면서 자기 자가용 인력거를 타고 성북동으로 오셨다. 진맥을 하고 나서 하는 말이 ʻ내가 오기는 잘 왔다. 심장에서 온 병인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간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 약 3개월 전에 마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구나. 그 충격의 상대가 웃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풀지 못하여 생긴 병인데 충격이 심장으로 갔더라면 곧 죽었을 것을 아래로 내려가서 다리로 온 것이다. 서양의학에서는 이런 병을 류마치스 관절염이라고 하지. 우선 5첩을 지어줄 터이니 그것으로 병은 다 낫겠지만 계속해서 2제를 다 먹어야 뒤탈이 없어진다ʼ고 말씀하시고 가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집안에는 생기가 돌았다.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선 5첩을 지어다가 그 날 저녁부터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저녁 식사 후에 첫째 첩을 다려서 먹고 나니 전신에 피가 도는 것이 마치 가뭄에 마른 땅이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 하루에 두 첩씩 다섯 첩을 먹으니 무릎의 물이 다 빠져서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나머지 약을 계속해서 다 갖다 먹었다. 20일이 걸렸다. 약값은 전적으로 내가 부담하였는데 아내가 여기저기에서 꾸어다가 충당하였다. 약을 다 먹고 나서도 재발 방지를 위하여 값싼 약 한제를 더 지어다 먹었다. 이것으로 투약은 끝났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병은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한약을 먹고 병이 완쾌된 것이다.
병은 다 고쳤지만 자유로운 보행을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일이 걸렸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서 정원을 거닐다가 적당한 소나무 한 그루를 골라 톱으로 토막을 내고 도끼로 찍어서 아궁이 옆에 갖다가 쌓아놓는 것으로 하루의 운동을 삼았다. 그해 눈 내리는 겨울에 이르러서야 나는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가서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은 신설동의 선생님이었으나 그러나 그 분은 그 동안에 고령으로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안 계셨다. 그 분은 결국 내 병을 다 고치고 나서 돌아가신 것이다.
내가 다리 병에 걸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평양에는 갈 수가 없었는데 이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때 만일 내가 젊은 혈기로 부모님을 배척하고 평양으로 갔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소득은 내가 걷지를 못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서재에 있는 책들을 많이 읽었다는 점이다. 서재에는 윤덕영(순조의 장인)씨가 가지고 있던 황제의 하사본이 쌓여 있었고 그 중에서 나는 주로 국사와 주역 그리고 불교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특히 나는 주역에 관한 것을 많이 읽었는데 그것은 신설동에서 아내가 처음에 한의사 선생님을 찾았을 때에 그 분께서 시계를 보고 점을 치셨다는 말에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나는 점복술 공부도 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하고 나서 표준세계년표라는 책을 지어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지금은 절판되어 있으나 그러나 나로서는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불교에 관한 책도 읽었는데 이 때에 주로 공부한 것이 천태학이었다. 법학과 경제학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 평양에 그대로 둔 채였다. 이 책들은 나중에 김일성대학의 도서관에 흘러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여하튼 다리를 앓으면서 주역을 공부하고 불교책을 읽었다는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어있다. 이렇게 본다면 1946년 여름부터 다음해 봄까지 다리를 앓았다는 것은 나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에는 몰랐지만 지나놓고 보니 그렇게 평가된다.
성북동 집에서 쫓겨나
1947년 봄부터 여름까지 지내는 사이에 집안내의 불화는 극도에 달하여 결국 나는 성북동 집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우리 식구는 달구지 1대에 짐을 싣고 필동으로 이사 갔다. 애들이 비를 맞으며 따라 나섰고 나와 아내는 앞뒤에서 달구지를 밀면서 성북동을 떠났다. 그 광경은 참으로 처량하였지만 부모님과 동생들은 끝내 냉정하게 대하였다.
과거에 내가 영천군에 근무할 때에 정병숙이라는 부하 직원이 있었는데 광복이 되어 나를 찾아온 그를 보건후생부에 취직시켜 주었는데 그가 필동에 있는 구총독부 관사에 집을 하나 얻어주어 입주하게 되었다. 그 정군의 관사에 방을 하나 얻어 이사 간 것이다. 그러나 이사를 가자마자 정군의 부인이 우리 식구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정군과 나 사이의 관계도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미 실업자가 되어 있었고 집도 없어졌으니 살 길이 막막하였다.
그동안에 선친께서도 성북동을 떠나야 하게 되었다. 백인기 씨의 손자와의 재판에서 패하여 그 집을 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로 그때에 평양의 기림리에 있던 우리 집을 재숙의 시아버님이 팔아서 그 값으로 30만원을 받아 인편으로 서울에 보내왔다. 선친은 그 돈으로 을지로 4가에 있는 집 한 채를 샀다. 이것은 일제 때에 조선전력회사의 독신자 아파트로 사용되었던 집이며 방이 8개나 있었다.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 오셨지만 해방이 되어 이북에 있던 재산을 모두 잃고 또 반도호텔을 산 것도 모두 빼앗겨 버렸으며 성북동의 저택마저 일장춘몽으로 날려 버리고는 겨우 을지로의 작은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선친의 신세가 딱하게 되었다. 더구나 정군과의 불화로 필동에 있을 수 없게 된 나는 식구들을 데리고 을지로 집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내 슬하에는 영채, 영준, 대유 그리고 성북동에 있을 때에 생긴 무궁화까지 넷이었다. 이때가 1947년 겨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