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과 인생
가을에 낙엽 하나가 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서 떨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은 이런 작은 하나를 통해서도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허무하면 허무한대로, 신비하면 신비한대로, 불행하면 불행한대로, 행복하면 행복한대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낙엽 하나 지는 모습에서도 자기 삶을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겸손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만약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수 있을까요? 마치 젊은이가 남의 죽음 앞에 별다른 느낌이 없듯이 말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 낙엽 하나 지는 소리에도 인생을 생각해보는 감정은 낭만이라기 보다는 우주의 신비를 생각해보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사색이 아닌가 합니다.
요셉동산 분위기
나는 10월경에 짐을 정리해서 요셉동산 양로원에 왔다. 처음 오는 곳이라 낮설었지만 어르신들께서 현관까지 나와 환영해주셨다. 내가 불편함이 없도록 여러 가지로 신경써 주셨다.
이곳은 가난한 작은 자매수녀회(경로수녀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이다. 특색은 정부 지원 없이 생활보호대상자만 올수 있고, 생활보호운영금과 후원자들의 현금과 주일마다 각 본당에 가서 모금해서 양로원을 운영한다.
처음 와서 놀란 것은 양로원이라고 하면 좀 지저분하고 냄새 나는 곳으로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건물을 지으면서부터 독일식 복지시설을 접목시켜 개인 독방에 화장실 샤워까지 모든 공동시설에는 부족함이 없도록 갖추어졌고, 식당은 호텔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이상적인 건축이었다.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여기가 양로원인지 호텔인지 착각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본디 독일식 양로원 복지시설이라서 이국적인 분위기도 느껴진다. 가끔씩 다른 복지시설에서 이곳을 견학 오는 일도 있다.
시설이나 운영 면에서 이 정도면 한국 중류층 가정 분위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식당 음식도 가정집보다 낫다. 나는 이곳에 살면서 부족함 보다는 만족함이 더 많았다. 어르신들은 선택받은 축복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은퇴하면 이곳에 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노인들의 쉼터요, 축복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 생활
아침에 미사로 하루가 시작된다. 얼마나 거룩한 하루의 시작인가. 이곳에 모이 불편해서 상주해 있는 강덕창(어거스틴) 신부와 이웃에 계시는 지정환(디디에) 신부와 공현섭(요셉) 신부와 합동미사가 매일 거행된다.
공현섭 신부는 내가 건강으로 공석일 때 미사를 대신 봉헌해주었다. 지금은 교포사목을 하고 있지만 성실한 사제다. 그리고 지정환 신부는 이웃에 계시기 때문에 자주 들러 어려울 때 조언을 구하면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강 신부는 건강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여 웃는 얼굴로 산다. 그래서 나는 강 신부가 이 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면 좋아한다. 사실은 우리 공동체에서 제일 많이 웃는 사람이다. 그리고 운동도 빠지지 않으면서 건강을 챙기고 있다.
나의 직함은 원목신부다. 이곳에 신앙문제에 책임자이고 상담자이고 제사장이다. 가끔씩 어르신들의 상담을 하다보면 기막힌 사연으로 놀라울 때가 있다. 소설로 책을 써도 모자랄 것이다. 나는 본당에서 느껴보지 못한 세상을 이곳에서 체험했다.
삶이 고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런 아픔을 안고 사는 분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위로 그리고 함께 해주는 일이다. 이런 중에도 가끔씩 외출해 식사하러 가자는 제안과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러브콜이 올 때가 있다. 될 수 있으면 이곳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들어주곤 했다. 사실은 나도 환자의 연장선상에서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삶의 노고에 비하면 내가 환자라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비뇨기과 요도 협착으로 배뇨장애, 과민성 방광염으로 저녁잠을 설쳤다. 만성피로, 우울증은 나를 소리 없이 괴롭혔다.
이곳에 있을 때 배뇨장애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스탠드 시술을 두 번이나 받았으나 결과는 호전되지 않았고, 배뇨장애로 저녁에 구급차로 응급실에 실려 간 일도 있었다. 이런 중에도 옆에 있는 신부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내 자리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서울에 통원치료를 하면서도 표시나지 않게 미사시간을 조절하면서 이곳에 피해는 주지 않았다. 통원치료에는 내 아래 아우가 많은 수고를 해주었다.
이곳에서 요양과 사목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님께서 적절한 곳에서 일하도록 안배해 주심으로 믿고 있다. 이곳에 있으면서 생활에 불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 건강 때문에 자신이 흔들리는 것 외에는 모두가 만족한 생활이었다.
이웃에 산보코스가 있어서 하루에 일과처럼 다녔고, 동생이 찾아와 골프장에 나가기도 했다. 한 가지 불편함이 있었다면 여름에 아랫마을에서 돼지 축사냄새가 신경을 자극할 만큼 거슬린 점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마을에서 데모도 하고 관계기관을 찾아 항의도 했으나, 결과는 진전이 없었다. 이것만 없으면 요셉동산은 명당자리다.
병마와 싸우며 재도전
이곳에서 2년을 지내고 건강을 좀 추스르게 되었지만 비뇨기과의 질병은 나를 계속 어렵게 하는 불치병이었다. 나는 여기서 마음의 변화가 왔다. 불치병이라면 평생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이다. 누가 말했듯이 불가능하면 수용하고 즐기며 살라는 말이 생각났다. 특히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받아들이면 우울증이 낫고, 거부하면 치료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 이제 해볼 것은 다 해보았다. 현대의학적인 치료도 최선을 다해보았지만 나의 한계가 여기까지 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나는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병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병마와도 싸우고 본당에 가서 적극적인 사목활동을 통해서 극복해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서 신부, 너는 할 수 있어.’
그래서 교구청에 본당 사목신청을 해서 전주 금암성당으로 자리를 옯겼다. 그동안 편히 쉬면서 건강을 추스르게 도와준 요셉동산 수녀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