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와 그리움
김 승 옥(소설가)
오랜 항해사이며 노(老)수필가인 김문호의 글에는 그가 살아온 여정처럼 치열한 관찰과 느낌, 관조하는 시선으로 예술의 미, 사랑의 애틋함, 아련한 빛살이 떨어진다. 김문호의 수필에서는 흡사 소설을 읽는 듯한 감성이 묻어난다. 김문호의 몇몇 작품들에서 가볍지 않은 사고의 폭을 짐작케 한다.
그가 오랜 세월동안 항로를 누비어 온 특이한 이력으로 다른 작가와 달리 이국적이고 거리감을 느끼는 감정을 소설 형식의 문체를 빌어 써내려온, 특이한 문체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대다수 수필들이 신변잡기나 연애담 회상의 가벼운 이야기들인데 비해 김문호는 그가 걸어온 뱃길의 삶을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1970년대의 항해사들의 삶을 그린 ⌜우리가 청년이었을 때⌟는 그대로 시대의 사진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
천구백칠십사년 삼월, 나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세종호의 일등항해사였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잭슨빌에서 칼륨(Potassium) 만 팔천 톤을 싣고 인천으로 항해 중이었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카리브해 쪽으로 침로를 바꾸려는 순간, 본사의 전문이 날아왔다. 마이애미항으로 들어가서 연료유를 보충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중략)
그때의 세태를 반영하는 일화가 있었다.
부산의 ‘동명목재’는 해마다 500만 불 이상씩 수출하면서 국내 수출 1위를 견지하는 굴지의 기업이었다. 그 회사의 강 모 사장은 직원들의 급여를 결재하는 날이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 자기보다 많이 받는 부하들 때문이었다. 합판 제조용 나왕(Lauan) 등 남양재를 실어 나르는, 기껏 오륙천 톤 소형 선박들의 선장과 기관장이 바로 그들이었다.
국내에서 그들에 비견할 만한 내 한 달 급여가 이곳의 하루치 숙식비나 될까 말까한 현실이 새삼 구차했다. 그것으로 계를 붓고 적금을 넣으면서 희망에 들떠 있을, 지구 반대편의 아내가 불현듯 불쌍했다.
⌜머슴⌟
당시 열 살이 될까 말까 했을 김문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훨씬 뒤에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머슴에 대한 주인의 후의였다. 그러나 사실은 주인에 대한 머슴의 배려였다. 당시의 주인과 머슴들은 상명하복의 획일성(동이불화:同而不和)보다는 상호존중을 통한 균형과 조화(화이부동:和而不同)의 시너지 효과를 숭상할 줄 알았던 것일까? 주인과 머슴이 상호 조력자로서의 관계를 그리워한다.
추수가 끝난 전답에 가을보리와 마늘을 갈고 나면 한 해의 농사는 끝이었다. 그러나 설까지는 두어 달이 남아 있어서 머슴들은 땔나무 비축에 나선다. 그럴 때면 새벽마다 길마에 걸채를 얹은 소들의 행렬이 인근 산중으로 떠나고, 저녁마다 고샅에 꽉 차는 나뭇짐 바리들이 마을로 밀려든다. 그러면서 집집의 나뭇더미가 쑥쑥 자라 오르고, 집채보다 더 크고 높아진 더미 위로 청솔 이엉이 이어지면 농가의 추수동장(秋收冬藏)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면서 머슴의 일 년 고용살이도 끝을 맺게 된다.
작별을 앞둔 머슴과 주인이 연중 두 번째의 겸상(兼床)을 한다. 그간 서로의 노고와 배려에 인사를 차리면서 격의 없는 대작(對酌)을 한다. 그러나 내년의 농사나 재고용 같은 것은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러고는 조청(造淸)이나 곶감 등 설맞이 먹을거리를 싸서 보내면서 작별을 한다. 마치 사랑방에서 며칠을 유했다가 떠나는 나그네와 주인같이,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처럼 그렇게 천연스럽고 정중하게…….
그러나 설 보름을 쇠고 나면 노사의 물밑 접촉이 활발해진다. 음력 2월초하룻날의 영등제를 올리고 나면 바로 농사철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갈매기⌟.
그들은 산으로 바다로 소년을 이끌어 비로소 사나이가 되도록 키운다. 수평선 너머에 있을 듯 상상되는 세계가 그의 발길을 붙들고 늘어지며 재촉한다. 김문호는 이 세계에 두 가지 결말을 제시한다.
그는 첫 태양의 감격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섬광이 바다와 하늘을 선홍빛 흥건히 물들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새 아침을 호흡한다. 그가 마시는 산소는 생성된 이래 어느 누구의 폐부도 거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것이다.
태양이 고도를 높이면서 수평선이 가지런해지면 창공을 날고 바다를 자맥질한다. 쪽빛 바다 속으로 살처럼 꽂혔다가 은빛 퍼덕이는 물고기 한 마리를 부리에 비껴 물고 시뻘건 노을 속으로 수직 솟구치는 모습은 장쾌한 생명의 찬란한 환희이다.
⌜만청(晩晴)⌟
뚜―, 뚜, 묵직한 저음의 기적이 사무실 창을 흔들면 또―, 또, 작은 고동들이 경망스레 섞여든다. 부두에서 몸을 떼거나 붙이려는 모선(母船)과, 그의 운신을 도우려는 예선(曳船)들의 호응이다. 보나마나 지금은 고조(高潮) 전 후 한 시간 이내의 시간대이며 도크는 들고나는 배들로 분주할 것이다. 양묘기(揚錨機)가 감아올리는, 혹은 풀어 내리는 닻줄 소리와 펄럭이는 깃발, 반쯤 드러난 스크루가 공중으로 차올리는 물보라 등.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삼십 리 길 읍내 오일장터의 그것 같은 설렘이다. 거기에 항구 특유의 애조가 해무(海霧)처럼 깔려든다.
젊은 직원들이 항구와 배를 오르내리는 사이, 나는 사무실에 앉아서 간혹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대부분이 지인들의 소식이나 안부, 아니면 각종 모임의 연락사항들이다. 현장 업무에 관한 것이라면 굳이 내가 받지 않아도 된다. 어느덧 다가온 노을빛 시간의, 내 작은 삶의 조촐한 여유다.
‘
나도 가끔은 부두로 내려가서 배의 트랩을 오르고 선장실을 노크한다. 선장이 내어놓는 캔 맥주를 그와 함께 마시면서 그로부터 대양과 항로의 소식을 듣는다. 바다가 삶의 터전인 그들과의 대면은 언제나 베링(Bering) 해의 미역냄새 같은 풋풋한 자극이다. 그러고도 시간과 취흥에 여백이 생기면 나는 그를 도시의 주점으로 안내한다.
불고기에 소주 몇 잔을 곁들이면 그들은 이내 소년처럼 행복해진다.
어둠이 짙어지고 항구의 불빛이 그만큼 더 빛나면 그와 나는 작별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
“행운의 항해를……”
“다음에 또, 건강히……”
인사가 좋아 재회의 다짐이지. 그와 내가 다시 만날 일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