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과의 인연 (43화)

임기가 끝날 때쯤 되어 김준엽 총장 후임이었던 이범준 총장이 롯데호텔에서 점심을 하자고 해서 나갔다. 짐작하건대, 후임 원장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 틀림이 없었다. 이 총장이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자 나는 생각했던 바를 꺼냈다.

“원장 퇴임 후, 석 달간만 단기 연수를 할수 있게 시간을 내주십시오. 자비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나는 평교수 자격으로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머리를 식혔다. 이 기간을 통해 나는 유럽여행을 했다. 물론 병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홀로 견디었던 고독과 스트레스를 한 올도 남김없이 깨끗이 비우고는 산뜻한 기분으로 귀국했다.

그 후 1년 동안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골프를 마음껏 쳤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허리 치료를 위해 이 즈음에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일이다. 1986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구로병원은 서울대 의대 졸업생 대거 영입과 급여 문제로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고 돌아보니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개원 초기에 형성된 흑자 체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운명의 트위스트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1984년, 당시 현대자동차에 정세영 사장이 구로병원에서 나에게 담석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을 때, 동생을 문병하러 온 정주영 회장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두 번 다 병원에서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진 것이다. 이 무렵, 당시 아산재단의 자문을 받고 있던 문인구 변호사의 제청으로 나도 아산재단 의료재단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받게 되었다.

아산재단은 1977년, 의료차원의 복지를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며 사회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1978년 시범적으로 전북 정읍에 100개 병상의 정읍병원이 첫 개원을 했다. 계속하여 보성, 영덕 등 여덟 개 지방에 의료복지를 돕는다는 취지아래 아산병원이 들어섰다.

그런 가운데 지방병원을 총괄할 수 있는 중앙병원을 지어야 한다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면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자문단 모임이 이루어졌다. 자문단에서는 의과대학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며, 병원은 풍납동에 1천개 병상으로 설립할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그때가 아마 겨울이었을 것이다. 성북동 영빈관에서 복어회를 먹는데, 한 사람당 큰 접시를 하나씩 주면서 엄청나게 많은 양을 나눠주었다. 값비싼 복어회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 회장의 통이 참 크구나 라고 생각했다.

참석자들이 식사를 절반쯤 했을 때, 정 회장은 벌써 다 마치고 후식을 즐기고 있었다. 여흥을 즐기는 자리에서도 정 회장은 마이크를 먼저 잡고 한꺼번에 노래 열곡을 릴레이로 불렀으니, 가히 정열파라고 할만 했다. 원래 노래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술을 피하기 위한 의도 같기도 했다. 아무튼 그에게서 대단한 강한 인상을 받았다.

▲ 고대 구로병원을 퇴임하고 1년여 동안 한가로이 골프를 쳤다 / 왼쪽에서 3번째가 필자

그 시기에 나는 고려대 의대의 평교수로 재직하면서 병원 업무를 마치면 정시 전에 퇴근하여, 수영을 배우는데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신설 서울중앙병원 병원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서울대 의대 이문호 교수와 의사들을 어떻게 영입할 것인가를 놓고 의논했다.

그 후 자문단은 최신식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을 만든다는 결의 아래 영국, 독일, 덴마크 등지의 유수한 병원들을 답사하러 다녔다. 모든 면에서 각광받는 최고의 병원으로 만들고, 의사들의 연구열을 늦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의 신설이 시급했다.

1987년 10월 23일, 울산의과대학 신설을 인가받았다. 1988년부터 의사 및 일반 직원들을 공채로 채용할 인사 방침을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하지만 국내 인적 자원으로는 한계가 있어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자천, 타천으로 스무 명 정도는 만나서 논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1988년 여름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미 병원장을 한번 해본 경험이 있는 내 의견을 듣고 이문호 병원장이 좋은 아이디어라며 반색을 했다. 당시 서울대 의대 정년을 눈앞에 둔 이문호 교수와 고대 평교수인 내가 둘이서 약 2주간의 예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내과계는 이 원장이, 외과계는 내가 도맡아서 사람을 만나고 평가하기로 했다.

상호간의 양해 아래, 미 동부와 중부, 그리고 서부로 나누어서 시간을 정해주고 개별 면접을 추진했다. 다행히도 시기적으로 1960년대 말에 무리를 지어 미국으로 건너갔던 의사들이 20여년의 고생 끝에 일을 성취했고, 그 결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겨 고향 한국이 그리워질 때쯤이었다.

게다가 병원 측의 공정한 인사방침이, 외국에서 대단한 명예와 높은 보수를 받고 있던 우수한 교수진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열 명 이상의 우수한 의사들을 영입해올 수 있었던 미국 순회 면접은 말 그대로 대성공이었다.

서울대 의과대학에서는 해외 출타 건으로 말이 없었지만, 고대 의과대학에서는 말썽이 될만 했다. 다른 병원 스태프 영입에 나서는 일이라면 못마땅하게 여길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표를 제출했다. 물론 서울중앙병원(현 서울 아산병원)이 개원하기 전이었다.

정식으로 임명될 때까지의 공백은 88올림픽이 다 메워주었다. 어느 체육계 고위인사 덕분에 나는 매일 보고 싶은 경기를 다 볼 수 있었다.

올림픽 대회가 끝난 뒤 1988년 11월, 나는 서울 중앙병원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내가 맡게 된 보직은 아산생명과학연구소의 초대 연구소장 겸 외과 과장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