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어른들을 산에 묻을 때마다 이제는 내 차례구나 하고 착잡한 생각을 한다. 죽음이 한발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그저 막연하기만 하다. 물장구치고 놀던 어린 날들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내 뜻도 아닌데 나이는 먹어 백발이 성성해졌다. 해 뜨는 때를 아침이라 하고, 해 지는 때를 저녁이라 하는데 그 아침과 저녁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냈건만 돌이켜 보면 잠깐이니 불가의 말대로 인생이란 물거품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어디를 가나 학생, 학생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하루는 버스 안내양이 ‘아저씨!’라고 해서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묘한 충격이었는데, 요즘도 문득문득 그때 생각이 새롭게 난다. 몇 해 전 일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에 간 일이 있는데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는 중에 점원 아가씨가 ‘할아버지!’라 해서 마치 전깃줄에 손이 닿을 때처럼 움찔한 일이 있다.
학생이 아저씨로, 아저씨가 할아버지로 변모한 것인데, 순간에 몇 천 리가 단숨에 보였다. 이런 것을 일컬어 격세지감이라 할 일이 아닐까. 요즘에는 어딜 가나 할아버지 소리를 다반사로 듣는다. 서글픔보다 신기하게만 느껴지는데 무슨 현상인지 모르겠다. 늙어간다는 것에 어떤 야릇한 만족감 같은 것도 있고 신선감 같은 것이 있다. 무슨 현상인지 모르겠다.
다방에 가나 술집에 가나 나보다 나이 든 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고 직장에서도 엊그제 신참 졸병이었는데 지금은 고참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친구라는 것이 젊었을 때의 일들이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제 할 일에 바쁘다 보니 만날 일도 없고 해서 술도 혼자 마시게 되고 차도 집에서 끓여 먹게 되었다. 그럭저럭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노는 것에 익숙해졌다. 때가 2월인지라 여기저기서 정년퇴직한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손가락을 더듬으면서 몇 해 남았나 헤아리게 된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동물 이야기, 식물 이야기를 즐겨 본다. 생명의 신비에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볼수록 동물이나 식물이나 사람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듯하다. 탄생과 삶과 죽음이 사람들과 별로 다를 데가 없는 듯하다. 약육강식이라더니 그 먹고 먹힘이 잔인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어 있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짐승이 순식간에 먹혀 없어지는 것을 볼 때 생명에 대한 허망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나만의 심사는 아닐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는 어찌해서 생겨났으며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궁한 이 시간이란 무엇인가. 헤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엄청난 별들 속에 지구라는 것이 있고 이 안에 온갖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것인데 인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1992년 여름 터키라는 나라를 여행한 일이 있다. 몇몇 신부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선교 유적을 돌아보러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비잔틴 미술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곳저곳을 많이도 돌아보았지만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천년 그리스도교 왕국은 흔적도 없었다. 하루는 어떤 마을에 당도해 짐을 풀었다. 길가 산자락에 무수한 석관(石棺)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크고 작은, 속이 빈 돌무덤들이 마치 사자가 입을 딱 벌린 채 죽어 있는 것처럼 허망한 모습으로 몇 천 년의 세월을 말하고 있었다. 석관에 묻힐 정도의 사람들이었으면 돈 있고 권세 있던 층이었을 텐데 다 어디로 갔는가. 이스탄불 박물관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이 있었지만 속 빈 돌덩어리임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땅과 바다만이 옛일을 말해 주듯 의미 있는 침묵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현이 살고 있었다. 수많은 훌륭한 예술가와 학자가 살고 있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성군과 폭군이 있었다. 그러나 천 년 이천 년을 단위로 할 적에는 사정이 달라지지만, 인류 역사를 일만 년을 단위로 할 적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 억년을 단위로 놓고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적에 그야말로 깜깜하다 할 밖에 도리가 없다.
미루나무 가지들이 환하게 봄빛으로 물들어 있다. 높은 산의 눈 소식은 아직도 끊일 사이가 없는데 뒷집 목련은 꽃순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싶다. 세상은 갈수록 찬란하게 보이지만, 돋보기 안경을 놓으면 신문도 볼 수 없고 걷는 길이면 거리부터 재게 된다. 평생을 그림에 매달려 그런지 갈수록 일하는 것이 즐겁긴 하나 근력이 부쳐 시간을 조절하게 되고, 할 이야기는 많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것 같아 언어를 아끼다 보니 형태는 뼈다귀만 남는 것 같다.
라디오의 음악은 베토벤이었다가 슈만이 되었다. 한다.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아마도 헨델일 것 같다. 작업실에는 만지던 흙이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내려갈 건가 조금 더 있다 가 볼 건가. 아, 이것이 삶이란 것인가.
할아버지가 세상 뜨실 때는 너무 어려서 영문을 몰랐다. 할머니 때는 철이 나서인지 가슴에 손을 얹어보고 이승과 저승의 한계 같은 것을 느꼈다. 어머니를 산에 묻었다. 그 후 십이 년 만에 아버지를 그 옆에 또 묻었다. 세월이 가고 있었다. 그 흐르는 세월 속에 내가 있었다.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 쏟아졌다. 옆에서 아내와 아들, 딸, 사위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나를 묻는 예행을 하는 듯싶었다.
붐비는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한다. 강원도에 눈 구경을 가야지 하고 날마다 노래만 하다 별 미련 없이 봄소식에 밀리는 나를 발견한다. 자연에 대해 생각하고 인생에 대해 생각하며 나의 예술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은 아이가 일찍 돌아오려나 기다리면서 점심때가 되었으니 또 한 끼 먹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천국이 있다곤 하나 가서 보고 온 사람이 없고 영혼이 불멸하다 하나 이 또한 알 수 없다. 진리라는 게 있나 해서 일념으로 찾고는 있지만 갈수록 태산이고, 유유자적한 해방의 경지가 있다 해서 욕심내지만 정신의 세계란 천지만큼이나 넓어 길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도 하늘에는 구름이 있다 없어졌다 하고 하루해는 길었다 짧았다 한다.
무한이라고는 하는 이 절대의 시간 앞에서 인생은 짧은 것이고 바닷가에 철썩 하고 파도칠 때 생겨났다 없어지는 무수한 포말 같은 게 아닐는지.
죽음을 가까이 볼 적마다 삶을 아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만의 심정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