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울린 카드 한 장 (1화)

예쁜 카드 한 장을 받아들고 마음이 설렜다.

고등학교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편지 봉투를 뜯는 순간’이라고 대답했다. 요즘도 카드나 편지를 뜯는 순간이 설레고 행복하다. 친필로 쓴 글을 대하며 보낸 이의 마음을 읽고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핸드폰 문자메시지가 폭주하는 요즈음 손수 정성스럽게 쓴 카드는 얼마나 정겨운지 모른다.

수년째 해마다 모교 의과대학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그동안 받아보지 못한 예쁜 카드와 편지를 받았다. 카드를 보낸 학생은 본과 3학년 학생으로 8년 전 아버지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학생은 대학 졸업 후 취업하여 일하다가 아버지의 폐암 소식을 듣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단다.

다시 의대 공부를 시작하면서 많은 역경을 겪으며 힘든 생활을 하였다. 의대 공부를 하는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가정주부였던 어머니가 다시 일선에서 힘든 일을 시작했다. 학생은 늘 어머니께 죄송하였고 그러는 와중에 장학금을 받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고 어머니께 효도하는 느낌이란다. 어머니께서도 감사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그 학생의 카드를 읽고 가슴이 찡하며 전기가 오는 듯했다. 그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50년 전 중학교 3학년 때 생각이 떠올랐다. 서울 치대에 재학 중이던 오빠는 어머니께 편지와 함께 조그마한 조선일보 광고문을 오려서 보내왔다.

그 내용은 ‘학원사’ 장학생 선발공고였다. 전국에서 1차 서류 심사를 한 후 70명을 선발하여 2차 필기시험을 거쳐 최종 20명을 뽑는다는 것이다. 전국의 중 3년생이 대상이며 학비 전액을 고1부터 대학 졸업까지 지급한다고 했다. 한 학교에서 1명만 교장 추천으로 선발하며 가정환경이 어려워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가슴이 설렜으나 한편으론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예쁜 카드 한 장을 받고,

어려웠던 중3 시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움 받은 때가 떠올라"

그때 우리 집은 의사이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우리 삼 남매를 공부시키느라 무척 힘들었다. 언니, 오빠 모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가정교사와 장학금으로 공부하였다. 큰댁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고 큰댁 어른들과 사촌들은 우리가 위축되지 않도록 무한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가정주부이셨던 어머니는 지인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서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요즈음은 CCTV가 있어 괜찮지만, 그 당시는 서점에서 책을 도난당하는 일이 많았다. 일일이 손님을 따라다닐 수도 없어 어느 한 순간 책이 없어지는 일로 손실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얼른 신문광고를 담임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평소 전교 1, 2등을 해온 나를 교장 선생님께 소개하고 추천서를 받게 하셨다. 전국에서 1등만 모인다는 서류 심사인지라 불안했지만 꿈에 그리던 1차 서류심사에 합격했다. 대구에서 서울로 2차 필기시험을 위해 상경하였다. ‘학원사’는 숙식과 교통비까지 제공하였다.

▲ 밀알의 밤(1964. 6.26.). 필자를 비롯한 각 중학교 수석들과 우등생 모임이다. / 재단법인 학원 밀알장학회는 1953년 고 김익달 선사(先師)가 6.25를 겪으면서 대구에서 처음 1기 장학생 12명을 선발하였고, 지금은 7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은 신문로에 위치한 여관에 투숙하였으며 한자라도 더 공부하려고 늦게까지 책을 보다 잠들었다. 그런데 어디서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솔자가 달려와 빨리 일어나라고 학생들을 깨웠다.

우리는 3층에서 허겁지겁 내려와 인원 점검을 하는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대전시 대덕에서 온 한 친구가 내려오지 않아 애태우며 소리치고 있었다. 한참 후 그 친구는 담요 한 장을 휘감고 “어디서 불이 났어?” 하며 걸어 나왔다. 모두 소리치며 그 친구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고 왜 늦게 나왔느냐고 원망했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 너무나 놀라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은 순간 문제들이 낯설지 않았다. 며칠 전 우연히 친구 집에 들렀다가 문제집이 있기에 친구와 함께 수학, 과학 문제를 풀어보았는데, 거기서 그렇게 많은 내용이 나올 줄 누가 알았으랴.

나는 거침없이 문제를 풀긴 했지만, 마음을 졸이면서 며칠을 기다렸고 마침내 20명 내에 들어가 합격하였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기적 같은 결과였다. 고 김근태 의원과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때 합격한 7기 학원 장학생들이다.

그 후 나는 무사히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재단법인 학원 밀알장학회는 1953년 고 김익달 선사(先師)님께서 6.25를 겪으면서 대구에서 처음 1기 장학생 12명을 선발하여 지금은 700여 명이 되었다. 처음에는 《학원》을 창간하면서 장학생 모집 공고를 내고 개인재산을 털어 ‘재단법인 학원장학회’를 만들었고, 1960년엔 학원사에서 독립하여 장학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학원》이라는 잡지와 《대백과사전》 등 많은 책을 출간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 그 후 ‘학원’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쳐 사회인이 된 사람들은 1996년에 ‘밀알 장학재단’을 출범시켰다. 장학금 수혜자들이 모여 다시 장학 재단을 설립한 예는 유일무이할 것이다.

‘학원 장학재단’과 ‘밀알 장학재단’이 합쳐 2004년에는 ‘학원밀알 장학재단’으로 재탄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 김익달 선사님은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후진에게 갚도록하라.”고 장학금을 받은 밀알 회원들에게 유훈을 남겼다.

선사님이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의 인성에 투자하신 결과 지금까지 그들이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정치계, 언론계, 의료계, 예술 분야, 법조계, 카이스트를 포함한 각 대학교수, 총장…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이 많은 밀알들이 활동하고 있다.

나는 축복 받은 밀알이다.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선사님의 뜻을 이은 우리 장학생들이 장학금을 쾌척하여 밀알학생들을 키워 나가고 나도 그 대열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모교 본과 3학년 학생으로부터 마음을 울리는 카드를 받고 지나온 발자취를 생각하며, 후배 학생에게 열심히 하루하루를 창의적으로 만들어 나가라고 조언하고 싶다. 좀 더 밝고 멋지고 찬란한 내일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