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논문 논란 (48회)

1958년(42세). 나의 박사학위 문제로 학계가 시끄러웠던 한 해였다. 그런데 이 무렵 나는 김범부 선생을 모시고 동양학 특히 주역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범부 선생의 지인이신 이대위 씨의 주선으로 낙원동에 있는 건국대학교에 동방학연구소를 설치하고 이종익, 오종식씨등 20~30여명이 모여 범부 선생을 모시고 주로 주역공부를 하였다. 약 4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당대의 석학이신 범부 선생의 강의는 무궁무진하여 우리들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나는 강의 때마다 아내 이선이를 데리고 수강하였는데 이처럼 훌륭한 분을 직접 모시고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생의 영광이요 행복이라고 우리 부부는 생각하였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나에게 석우(石隅)라는 호를 지어 주셨고 나는 이호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 때 선생님은 우리나라는 그 전체가 하나의 돌(石)인데 그 돌의 한구석(隅)을 네가 맡으라고 말씀하셨다.

1976년 12월20일에 출판문화협회에서 유족과 친지들 100여 명이 모여 그 분의 10주기 추모식을 가졌고 나는 여기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에 관하여 한마디 하였다.

1959년(43세) 박사학위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또 부교수에서 교수로 승진하는 문제도 문교부와 반대파의 장난으로 정부발령을 받지 못하였다. 한편 승려들의 무성의로 인해 대각회는 이리저리 쫒겨 다니기만 하였으므로 나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단지 막스웨버의 저작 전부를 구입하여 그의 사회이론을 공부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는 대각회원들을 데리고 망월사에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매주 일요일에는 등산을 하였다. 수십 명의 남녀 학생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면 모든 시름을 잊을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일요일이면 으례 산에 오르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아내 이선과 영채 등도 따라 나섰는데 그 당시에는 여자가 등산복을 입고 거리에 나서면 하나의 구경거리가 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산에 오르다 보니 나의 건강유지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술살이 올라서 83kg이나 되던 체중이 1년 정도 계속해서 산에 오르니 10kg이나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체중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산에 오를 수 있는 건강과 여건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 훗날 유기천 교수의 논문을 둘러싸고 황산덕 교수와 논쟁을 벌인 사건을 다룬 경향신문의 기사 (1965. 10.2.)

유기천 교수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그는 Yale대학에 제출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의 요지를 사상계지에 발표하였다. 한국의 문화가 샤마니즘인양 쓰여진 그의 학위논문은 한국사람들을 마치 미신 신봉자인 것처럼 쓴 글이어서 이에 대해 격분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그 논문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그는 나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곁들여 반박하는 글을 썼다. 이 글에 격분한 고고학자인 김정학 교수는 나를 대신해서 유 교수를 공격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우리나라 고고학과 고대사의 전문가가 쓴 글이었기 때문에 김 씨의 공격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였다. 이리하여 유 교수도 별 수 없이 침묵하고 말았다. 이에 관한 자세한 것은 손세일편 한국논쟁사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때 나는 장준하 사장의 배려로 잡지 사상계의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자주 글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해의 여름방학이 되자 사상계 주최의 순회강연에 나섰다. 한태연, 양호민, 이길상 교수 등과 한 조가 되어 8월16일에서 25일 까지 10일간 전주, 순천, 여수, 광주, 목포를 돌아오는 것이었다.

16일 아침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어떤 스님이 작은 산삼 한 개를 가져 왔기에 나는 그것을 집어 꿀에 찍어 먹고 집을 나섰다. 서울역을 출발한 우리들은 기차가 영등포를 통과할 무렵부터 식당차로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취기가 들기 시작하여 25일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

16일에 전주에서 1박하고 순천을 거쳐 여수에 도착하는 강행군이었다. 여수역에 내리자 그곳 유지들이 마중 나왔다. 우리들은 곧바로 배를 타고 남해도로 가서 어민들에게 어패류를 잡아오라고 부탁하고는 해변가에서 종일 술을 마셨다. 저녁때가 되어서 시내로 돌아와 시립극장에서 강연을 하고 다시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밤 10시가 되자 모두 취해버렸는데 내 앞자리에서 대작하던 CIA대장이라는 청년이 동향 선배를 만나 반갑다고 하면서 큰 유리잔에 술을 따라 자기가 먼저 마신 후 나에게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종업원 아이한테 소금을 가져 오라고 해 놓고 그 소금을 조금씩 술에 타서 마시고는 그 잔을 다시 청년에게 돌려주었다. 청년은 또 술을 다 마시고는 나에게 주고 나는 또다시 소금 탄 술을 마신 후 잔을 그 청년에게 돌려주는 식으로 다섯 번 정도 왕복하였다. 그런 후 나는 속으로 이제는 더 이상 못 먹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청년이 앞에 놓인 술잔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그냥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침묵 속에서 벌어진 술 싸움에서 결국 내가 이긴 것이다. 소금을 조금 타서 술을 마시면 술을 토하지 않는다는 비법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종업원들에게 빨리 의사를 불러오라고 소리 지르고는 부리나케 여관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광주로 가서 법과대학의 김기두 교수 부친(5.16후에 별세)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다음에 우리들은 목포로 갔다. 그런데 목포의 경찰서장은 경무대에서 근무하다 내려온 경찰로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그는 우리의 강연 동기가 불순하다는 트집을 잡고 강연회를 열지 못하게 하였다. 장준하 사장이 급히 목포로 내려와 서장에게 강력히 항의한 끝에 간신히 강연허가가 나오긴 하였으나 막상 강연회를 하고 보니 노인 4~5명과 어린이 10여명이 넓은 강당에 있을 뿐이었다.

경찰관이 입구에서 신분증명서를 일일이 조사하는 바람에 일반 청년들은 겁이 나서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주 김이 빠진 채로 예정된 강연은 모두 끝 마쳤다. 이길상 교수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과학문명에 관한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다. 그날 밤 우리들은 마음껏 술을 마셨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