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사람들
세월이 지나고 보면 생각나는 추억들이 많다.
나는 지금 40년 전 고마운 추억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집에서 잠깐 쉴 때 이웃마을에 사는 동년배 친구와 작당해서 돈 몇 푼도 없이 배낭 하나 메고 훌쩍 집을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 유행하던 무전여행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살기는 어려워도 세상 인심이 어디를 가더라도 밥 한 끼는 공양 받을 수 있었다. 기차는 눈치껏 타고 다니다가 들키면 꿀밤 몇 대로 대신하고, 가까운 곳은 다리품을 팔아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마지막 여행목적지를 제주도로 잡았다.
집을 떠난 지 10일이 지나고 보니 가진 것이 다 떨어져 남루한 차림으로 구걸행세를 하게 되었다. 사실은 광주에서 목포까지의 기차편을 신세진 것이었다. 배를 탈 때는 어쩔 수 없이 뱃삯을 지불해야만 했다.
탈진된 상태였기에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의 어려움을 거절하지 않고 도와주었던 그때의 동료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자리를 통해서 그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행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목포에서, 그때 기억으로, 가야호를 타고 8시간 정도 걸려 해질녘에야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가는 도중에는 배멀미로 고생이 많았다. 세상에서 처음 타보는 뱃길이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대단했던 배였으나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제주도에 내려서는 어느 시골 농가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께서 방 한 칸을 내주셔서 그곳에서 자고 아침 일찍 한라산에 올랐다.
지금 같으면 자동차가 산 중턱에까지 오를 수 있지만 그때는 마을에서부터 도보로 걸어야 했다. 아무 경험도 없이, 장비 하나 없이, 옷 한 벌에 운동화 하나 신고 산에 오르다보니 산중턱에서 해가 저물었다. 텐트도 없이 무모한 산행을 한 것이었다.
마침 지나가던 일행이 그곳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하룻밤 신세를 지자고 청했더니 순순히 그렇게 하자고 해서 처음 만난 사람과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아무것도 덮지 못하고 잠을 잤기 때문에 배탈이 나고 말았다. 아침 식사를 하고 등산길에 나섰는데, 간밤에 설사를 하여 탈진된 상태였기에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다행히 함께 가던 일행이 나를 부축해주고 떠메다시피 하여 서귀포까지 넘어 올수 있었다. 그때 그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녁에 찬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 내가 배탈이 나서 고통이 심했을 때에도 그들이 구급약으로 아를 치료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요사이 TV에서 장마철 산행을 하다가 조난을 당하는 뉴스를 보면 그때 일이 떠올라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지금은 장비도 좋아졌고, 산행 홍보도 잘되어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이런 것을 무시하여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아픔을 느낀다.
지금은 무전여행이란 말도 없어졌다. 그런 것은 용납이 안 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부디 여행에서 또는 등산이나 야영 중 사고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모든 일에는 사전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싶다.
또 한 가지 내가 산행했을 때 나의 어려움을 거절하지 않고 도와주었던 그때의 동료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자리를 통해서 그 마음을 전하고 싶다. 만약 그때 해질 무렵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떤 상황이 되었을까?
그리고 나를 끝까지 부축해준 그 친구들이 생각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도 살만큼 크다고 하였다. 그때 친구들도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
혹시 이 글을 접하고 기억이 나시거든 소식 한번 주십시오. 나에게도 신세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와 인연을 갖고 살기에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좋은 일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 반성해보니 그때 산신령께서는 내가 산신령의 재물이 되기에는 모자람이 너무 많아서 살려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제자로 쓰시려고 골라 놓으신 모양이었고, 한라산은 나에게 더 큰 일을 하라고 하산시켜준 것인가보다. 그러나 아직도 도사가 못되어 갈팡질팡 할때가 많다.
한 가지 일에 10여년이면 도사가 된다고 하였는데, 30여년 가까이 성직에 있었지만 도사는 그만두고 지금까지 갈팡질팡 오리무중이다. 철들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때가 언제인지는 나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