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으로 이사가다
그때의 농촌사람들의 소원이 그러하듯, 아버지께서도 생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구미의 농촌생활을 탈피하여 새로운 삶으로 바꾸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던 차에 둘째 누님이 충청북도 영동으로 출가하시게 되어 이 기회에 아버지께서 영동을 돌아보시고 숙고하신 끝에 용단을 내리시어 1936년 봄에 충복 영동군 영동읍 소용리 345번지에 조그만 방앗간을 차려 그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따라서 나도 열 살이 되던 해에 4학 년 1학기에 영동 제2공립심상소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영동에 이사한 초기의 가세는 여전히 어려웠으며 아버지와 형님 두 분이 직접 방앗간 일을 보시고 경영하셨다.
형님 두 분은 그 당시에 농촌 형편이 그러하듯 중등교육은 엄두도 못 내고 보통학교만 마친 채 방앗간의 가업에 종사하였으며 14살 위인 큰형님은 대단히 성품이 너그러우셨고 작은 형님은 기계 다루기와 기계 만들기 등 기계 기술에 재능이 뛰어나셨다.
이사 간 다음 해인가 여름 장마철에 앞 냇물이 넘쳐 흘러 집의 마루 밑까지 물이 들어와 집과 전 재산이 일시에 떠나갈 찰나였다. 구미에서 얼마 되지 않은 논밭을 싼값으로 팔아서 빚을 갚고 나니 얼마 남지 않은 전 재산으로 장만한 방앗간과 집이 장마에 떠내려가게 되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속히 집을 비우고 피하라고 야단이나 아버지께서는 이 집과 운명을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촌보도 떼어놓지 않으시니 우리 식구는 당황하여 아우성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천우신조의 위기일발 직전에 비가 멎고 물이 점차 빠지기 시작하여 무사하였다. 그리하여 그 후 시일이 지남에 따라 집의 형편은 조금씩 나아져갔다.
영동소학교의 기억
1936년 봄 4학년 1학기 어느 날 학교에 처음 나갔더니 담임선생이신 김익근 선생님께서 여러 학생들에게 나를 소개하신 다음 무엇인가 인사말을 하라고 하셨다. 낮설은 학교에 와서 처음 교단에 올라가니 가슴이 떨리기는 하나 당당하게 소감과 부탁을 하고 내려왔다.
그랬더니 내 말투가 전형적인 경상도 사투리였으므로 여러 아이들이 내 사투리를 흉내를 내먼서 놀려대는 것이 아닌가. 그 놀림도 그 당시만이 아니고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객지에 와서 이 놀림을 당하니 기가 죽고 의기소침 될 수밖에 없었다.
내 반에서는 나의 나이와 키가 가장 작은 편이므로 그렇지 않아도 기가 죽을 판인데, 거기다가 사투리의 책을 잡히니 기를 펼 수가 없어 그저 말없이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친척 하나 없는 객지에 와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고, 4학년의 다른 반은 남여 혼성 반이었으나 내 반에는 여학생이 없었으므로 소학교 시절에는 여자친구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공부만 하였으나 워낙 나이가 많은 학생이 많아 성적은 겨우 상급이 될까 말까였다. 학교 공부는 산수와 같이 이해하는 과목은 재미가 있고 별도로 공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쉬웠으나 깡그리 외워야하는 암기과목은 질색이었다. 특히 길고 까다로운 진무, 스이제이, 이도구등으로 외워 길고 까다로운 일본 천황귀신들의 이름을 외워야하는 일본국사 시간은 지겨웠다.
5, 6학년 담임선생님은 정직래 선생님이었는데, 정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갓 나오신 분으로 글씨, 음악 등 모든 것에 뛰어나시어 다재다능하셨을 뿐 아니라 열의 또한 대단하셨다. 장차 상급학교에 갈 학생을 모아 수업이 끝난 후에 별도로 지도하셨는데, 그 교재를 손수 일일이 프린트하여 오실 뿐만 아니라 졸업시기에는 몇 사람을 밤에 선생님 집에까지 오게 하여 가르치셨다.
물론 과외로 돈을 더 요구한 적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이분이야말로 정말 스승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 선생님은 후에 국회의원까지 하셨다.
평범한 소학교 생활을 하였으므로 별 다른 기억은 없으나 6학년에 가서는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일과 중의 휴식시간에는 진도리를 많이 하며 놀았는데, 진도리는 적군의 진지를 빼앗는 일종의 병정놀이로서 두 편으로 나뉘어서 먼저 출발하는 편을 뒤 쫓아가는 편이 손으로 쳐서 잡는 놀이로서 나는 달리기을 잘 하는 편이었으므로 인기가 있고 재미가 났다.
6학년 때 서울에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수학여행을 가기 며칠 전부터 잠이 오질 않을 정도로 기다려졌다. 그것은 영동으로 이사 온 후의 첫 나들이였으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그것도 꿈에 그리던 서울여행이었다. 서울에 가서 여러 가지 번화한 풍물을 본 것 중에 덕수궁, 창경원 구경 그리고 화신백화점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본 것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우리집의 정미소 경영
나도 영동소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시간이 나는 대로 방앗간 일을 거들었다. 이것이 먼 훗날 대학 강단에서 내 전공인 농산식품가공 가르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영동으로 이사 간 후에 전기가 처음 들어와 정미소라고 해봤자 모터 3마력인가 5마력에 나사 절구식 정맥기, 원통 마찰식 제분기의 분쇄기, 풍구 등 총 4대의 설비기가 전부였다. 벼는 제현을 하지 않고 직접 정미기의 적은 탱크에 부어 정미기의 도정부를 지난 것을 받아 다시 탱크에 붓는 것을 되풀이하는 소위, 삭찧기를 하였다.
그런데, 삭찧기는 벼가 덜 마르면 싸래기가 많이 생길 뿐만 아니라 겉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벼 그대로인 뫼가 섞인 채 남게 된다. 이것으로 밥을 지었을 때는 보통 밥에 섞인 뫼를 젓가락으로 번번이 골라가면서 식사를 하였다. 2~3년이 지난 후에야 제현기를 들여와 벼를 제현하여 현미를 만들어 현재와 같이 정미를 하게 되었다.
보리는 나사절구식 정맥기를 이용하여 물을 붓는 온수도정을 하였는데, 그 당시 보리는 물을 부어야만 도정할 수 있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1940년경부터 연제식 정맥기가 나오게 되어 물을 붓지 않는 소위 무수(無水)도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혼수(混水) 정맥 보리쌀은 현재 말하는 겉껍질밖에 제거되지 않아 과피, 종피, 호분층은 그대로 남아있는 소위 현맥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한번 삶아서는 밥이 되게 퍼지지 않으므로 일단 물을 붓고 예비로 삶아놓았다가 다시 밥을 지어야만 쌀과 함께 퍼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 가열하면 퍼지기는 하나 원래의 보리쌀에 있던 검은 선인 고랑이 밥알에 그대로 남아 밥이 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옛날에는 순 보리쌀로 지은 보리밥을 꽁두 보리밥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