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최치원조에 의하면, 고려 왕건에게 상서(上書)한 내용 중에 계림황엽 곡령청송, 경주의 계림은 누런 잎과 같고 송도를 소나무와 같다)이라 하여,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내다보았으나 후세 사람들은 그의 감식지명(감식지명)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처자를 거느리고 가야산에 입산하여 가야금을 타면서 시와 풍류로 신라의 망국한을 보냈다 하는데, 학사대, 농산정 등 유적이 지금도 홍류동 계곡에 남아있다. 농산정 맞은편 절벽바위에는 칠언절구의 시 한편이 지금도 선명하다. (탁본한 것을 족자로 만들어 서재에 걸어두고 틈틈이 음미해본다)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류수진롱산)
첩석한 돌에 미친 듯이 달려들어 거듭 으르렁 거리니
사람의 말소리조차도 지척간에 알아듣기 어렵구나
늘상 시시비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로 하여금 모든 산을 감싸버렸구나
최치원의 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당나라에서 17년간 있으면서 많은 詩ㆍ文들 가운데서 가려 뽑아 스스로 시문집을 만든 것으로, 고국에 돌아와서 헌강왕에게 바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문집으로, 작가가 생전에 직접 자신의 문집을 만든 최초의 것이 되어 한국문학사에서 조종(祖宗)을 이루었다.
<계원필경>에 수록된 시문은 시 60수, 문 310편이 되지만, 근년에 이르러 여러 차례 최치원 문집을 간행하면서 국내 문헌에 산재한 유문들의 수습을 일단 마무리하여 가장 많은 시문을 수록하고 있는 <고운선생문집>에 따르면, 시 115수, 문 353편으로 집계된다. 고려 현종은 그의 문재를 기리기 위해 문(文)을 상징하는 문창성(文昌星)이란 별을 따서 문창후(文昌侯)로 봉하였다.
최치원의 명성은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선조 때 가야산 곳곳의 돌틈에서 종이에 쓴 최치원의 유작시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문묘에 배향(1620)할 인물로 최치원을 택하였는데, 이로보아 최치원이 국가의 정치와 국민의 교화의 공을 세운 최초의 학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5년 11월 중국 최고의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국가주석 강택민이 방한하여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사적 방한을 천 년 전 양국 간의 관계에서 풀어나갔고, 그 첫손가락으로 민간외교관 최치원 선생을 꼽았다. 당시 세계사의 중심이며 문화재국임을 자부하던 당나라에서 신라출신 최치원이 보여준 활약과 명성은 그만큼 커다란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는 최치원의 30세손으로서 이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최치원은 위대한 학자이신 동시에 한가지 더 보탠다면 최초로 나무를 심은 식재가(植栽家)임을 말하고 싶다. 또한 나는 그의 후손답게 조경식재가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조선 선조 24년(1591)에 노승이 절을 찾아가던 중 지리산 골짜기를 헤메다가 바위 틈에서 여러 권의 책을 발견했다. 노승은 책을 뒤적이던 중 시 8수가 수록된 최치원의 정교한 필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승은 이를 구례군수 민대륜에게 바쳤고, 민 군수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 이지붕(본명 이수광)에게 글을 보내 확인한 결과 최치원의 필적이 분명하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때마침 중국청화대학 중문학과 양민(梁民)교수가 우리 대학의 초빙교수로 와 있기에, 글씨를 받아 8폭 병풍을 만들었는데, 행서 글씨도 아름답고 명필인지라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유작시 8수는 아래와 같다.
東國花開洞 (동국화개동) 동쪽 나라의 꽃피는 마을 화개동은
壺中別有天 (호중별유천) 항아리 속의 별천지라네
仙人推玉枕 (선인퇴옥침) 선인이 옥베개를 밀치고 일어나니
身世欻千年 (신세훌천년) 몸과 세상이 훌쩍 천년이 지났다네
春來花滿地 (춘래화만지)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秋去葉飛天 (추거엽비천) 가을이 가니 하늘에 낙엽이 날리네
至道離文字 (지도이문자) 지극한 도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元來是目前 (원래시목전) 원래부터 눈앞에 있었다네
擬說林泉興 (의설림천흥) 자연에 흥취 있다고 말들 하지만
何人識此機 (하인식차기) 어느 누가 이 뜻을 알겠는가
無心見月色 (무심견월색) 무심히 달빛을 바라보며
默默坐忘歸 (묵묵좌망귀) 묵묵히 앉아 돌아갈 줄 모르네
密旨何勞舌 (밀지하노설) 은밀한 뜻 어찌 구구하게 말하리
江澄月影通 (강징월영통) 강물이 맑으니 달그림자 비치고
長風生萬壑 (장풍생만학) 골짜기에서 바람이 이니
赤葉秋山空 (적엽추산공) 붉은 잎 가을산이 비워지는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