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 반지의 여행 (3화)

의과대학 학생들의 공모전 수필을 읽으며 나는 그때를 돌이켜 본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었던 아픔이 슬며시 되살아난다.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떠올려 보니 나 스스로 더욱 강하게 다지게 된 순간이었다고 확신한다. 잿빛 같은 암울한 현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먼 미래의 무지갯빛 꿈만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먼 훗날 언젠가는 내가 바라던 의사가 되겠지…’ 하는 의욕만 가진 채.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가며 편안하게 의과 대학을 다니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6년간의 학비는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만으로 상경한 것이다.

바로 ‘학원 장학생’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으니까. 학비 걱정이 해결되어 얼마나 자신만만하였던가. 의예과 1년 때 학교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하고 내 힘으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으로 알고 다른 친구에게 양보하였다. ‘학교 장학금을 받을 걸…’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역시 잘한 일이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 당장 잠잘 수 있는 집부터 비싼 의학책과 교통비, 용돈도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서울에 온 터라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특히 학원장학금을 받으려면 대학에 꼭 합격해야만 했다. 합격 가능성이 적은, 경쟁률 높은 학교에 원서접수를 했다 실패하면 낭패를 당하는 것이다.

‘안전하게 가자’고 택한 나의 결정은 지금 생각하면 최상의 선택이었다.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가서 나는 인간적으로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의학공부를 하면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인간 본연의 독한 성격을 가진 강한 여성으로 변했다. 동시에 의학적 학문과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품성과 인격의 함양을 위한 생활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잠시 혼돈의 시간도 경험했다.

"어느날 밤 급작스레 입주 가정교사 집에서 나오니 갈데가 없어...

여중 졸업식 수석의 상으로 받은 금반지로 등록금을 치러

그 반지는 어디로 여행을 갔는지 영원히 내 손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가끔 대구여중의 교화인 매화꽃 모양의 금반지를 상상"

그러나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마음을 힐링 시키고 채플시간에 들려주는 교목의 설교는 나의 마음을 평온으로 이끌어주면서 인성을 성숙하게 해주었다. 다시금 나의 진로 선택이 옳았음을 느끼고 있다.

내가 받은 혜택을 언젠가는 갚을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학원장학회를 설립하신 김익달 선사님은 ‘나에게 갚을 생각 말고 후학들에게 갚으라’고 하셨다. 지금도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 시절 많은 대학생들이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 조달과 의식주를 해결했다. 나 역시 가정교사라는 일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세상이 두렵지 않았던 나는 늦둥이 초등학교 5학년 외아들을 둔 효자동 어느 댁에 입주하게 되었다. 그 소중한 아들을 가르치는 나는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많은 집은 아니었지만 저녁밥을 정갈하게 차려주는 부인이 언니처럼 고맙게 대해주어 난 그 아이를 조카처럼 여기고 열심히 지도하였다.

▲ 이화여대 시절 / 왼쪽에서 2번째가 필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대대적인 부부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여대생인 나는 부부 사이의 문제점에 대해 이해할 나이도 아니고 무섭기만 했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나이 많은 남편은 술만 먹고 오면 부인에게 부부관계를 요구하지만, 부인은 별로 흥미가 없는지 응대하지 않았다. 남편은 의처증이 발동하여 다른 남자가 있어 거절하는 거라고 폭력을 휘둘렀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본 나는 너무 무서워 아이를 앞집 할머니 댁으로 보내고 허겁지겁, 대책 없이 집을 나왔다.

오밤중에 갈 곳이 없었다. 순간 스치는 생각은 신촌 부근에 사촌 언니가 산다는 것이었다. 무작정 버스를 탔다. 신촌 골목을 헤매다 다다른 곳에서 대문을 두드리며 “언니야!” 하고 외쳤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전화도 없던 그 시절, 서울 길을 전혀 모르는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당황스러웠다. 막차를 놓칠까봐 부리나케 다시 효자동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 시각이 밤 12시. 마침 단짝이었던 친구네 집으로 염치불고 하고 쳐들어갔다.

놀란 친구는 나의 사정을 듣고 오빠에게 왜 연락 안 했느냐고 야단이었다. 다음 날 오빠에게 연락하니 바보스런 행동을 했다고 호된 꾸중을 들었다. 그날 밤 무섭고 아찔했던 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느 학기에 갑자기 등록금 지급이 불가하다는 학원사의 연락을 받았다.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 난 것은 나의 유일한 재산인 금반지였다. 대구여중 졸업식 때 수석의 상으로 받은 금 석 돈의 매화 반지이다. 그 금반지를 담보로 내 등록금을 마련했다. 얼마 후 금반지는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때 무척 마음 아파했던 오빠가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내 금반지를 찾아 준 것이다.

학원장학회에서는 후기 등록을 하라며 장학금을 지급한다고 했으나,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두 번째 장학금 지급이 어렵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물론 친척의 도움과 금반지로 등록금은 해결되었지만, 그 금반지는 내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수많은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에서 교장 선생님이 내 손가락에 끼워주셨던 묵직하고 투박한 매화꽃 모양의 그 반지가 가끔 생각나곤 한다. 그러나 그 반지는 어디로 여행을 갔는지 영원히 내 손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제는 대구 여중의 교화인 매화꽃 모양의 금반지를 상상할 뿐이다.

그 후 학원 장학금은 계속 지급되어 무사히 의과 대학을 졸업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굴곡이 없는 평탄한 인생길을 걸을 수는 없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그 속에는 슬픔과 고뇌, 행복과 좌절… 수많은 인생의 굴곡이 있다. 이 굴곡의 리듬을 타고 있는 파도는 인생을 파괴할 수도 있고 정복할 수도 있다. 이제 나에게는 그때의 힘든 굴곡이 하나의 반짝이는 별이 되어 나를 더 밝게 빛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