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그 당시에 흔히 볼수 있던 기계(機械)선전관이 기계 카다로그를 가지고 와서 여러 가지 기계를 권하다가 무수(無水)정맥기라는 그림을 보이면서 물을 붓지 않고 보리를 찧는 기계라 한다.
거짓말 마라.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은 헛말이라도 들어본 적은 있으나 마른 보리방이라는 말은 도대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장사를 해먹으려면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야 될 것 아닌가.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이냐!
너무나 먹혀들어가지 않자 그 자는 가방 속에서 그 당시로는 보지 못한 마른 보리쌀을 한주먹 내놓으면서 물을 조금 많이 붓고 밥을 지어보라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시키는 대로 밥을 지었더니 과연 색도 돌고 고들고들한 보리밥이 되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물에 담가두었다가 쌀과 섞어 함께 밥을 지으면 그대로 보리밥이 섞인 흰쌀밥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시골의 정미소 경영규모로 볼 때 바른 보리방아를 찧는 소위 구소식 정맥기는 온수 정맥을 하는 절구 나사식과 횡형 원통 마찰식 정맥기에 비하면 그 값이 월등하게 비싸서 여간해서는 구입하기 어려운 시정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일단 용단을 내려 빚을 얻고 하여 그 당시로는 혁명적인 무수 도정정맥기를 1대 사서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주위의 영세한 동업자들의 모략도 가세하여 일반 사람은 그때로서는 상식에 맞지 않는 무수정맥을 외면하여 도대체 보리를 찧으러 오는 사람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따라서 한 해의 여름은 허탕을 치고 말았다. 빚을 져가면서 막대한 자본을 들여 한 해를 공쳤으나 우리집은 사업적으로 큰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 중에는 개명(開明)한 사람도 없지 않아 처음에는 몇 사람의 고객이 생기더니 날이 갈수록 진가의 효과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보급선전되어 다음해에 가서는 문전성시를 이루어 밤낮 쉴 새 없이 보리방아를 찧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우리 집 사업이 성공한 것은 물론 다른 동업자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이 정맥기를 구입 설치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1942년 전후의 영동지방에서 혼수(混水) 정맥기 무수(無水) 정맥으로 바뀐 역사이다. 그리고 1941년경인가 정미소의 옆 건물에 우마차를 만드는 작은 철공소를 차리고 곧 이어 탈곡기도 만들어 팔게 되었다.
그 당시 탈곡기를 만드는 것은 상당한 기술과 경영 규모가 있어야 하는데 기술로는 탈곡기의 베어링이 문제여서 필자가 배운 그 알량한 화학 지식을 동원하여 책을 읽고 하여 소위 탄소 야기라는 것을 하여 쇠를 편화시킨 베어링을 만들어 탈곡기에 끼워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1940년에 일본인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처음 아버지께서는 여간해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지 않고 애초의 기한이었던 7월 20일까지는 용케도 견디셨으나 그 후 주재소의 순사와 면직원이 여러 번 찾아와 협박하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으로 하기로 하셨다.
김씨를 그대로 두고 김본(金本)이나 본관에 따라 선산이니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겠으나 다 같이 마땅치 않을 뿐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이 앞서서 그와 같이 창씨개명을 하였으니 그렇게 따라할 수도 없게 되었다. 에따 모르겠다. 이왕 바꾸는 것인데 무엇을 주저하랴 하는 반동적 심리도 작용하여 성을 공고[金剛]로 완전히 바꾸고 말았다.
이것으로 일본 천황의 황공하옵신 내선일체의 배려에 따라 반도인의 주제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황민으로 신분이 격상된 셈이었다. 이 이름은 45년까지 요령에 불이 날 정도로 많이 쓰였고, 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7분 도미와 솜타기
1937년인가 중국의 노청교사건으로 소위 지나사변 즉 중일전쟁이 일어나서 부터는 전장에 나가는 일본 군인이 열차로 영동을 통과할 정도로 자주 동원되어 역에 나가 무운장구를 빈다하여 히노마루 일본기를 흔들면서 갓데 구루소도 이사마시쿠......(승리할 것을 다짐하고 용악 출정한.......)로 시작되는 일본 군가를 부르고 “덴노 헤이가 반사이(天皇陛下萬世)”를 외쳐가며 전송하였다.
1940년 이후에는 일본의 2차 대전의 수행을 위하여 국가동원령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모든 분야에서 통제를 강화시켰다. 그 중의 하나가 7분도미의 유통이다. 즉 모든 쌀은 7분도미로만 거래하라는 것이다.
원래 쌀의 도정도라는 것이 판단하기 애매한 것이어서 목의 힘줄이 센 자가 7분도미를 8분정도미라 우기던 그렇게도 판단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미소에서 도정한 쌀을 언제 조사원이 나와 시비를 걸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심히 전전긍긍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 무렵 솜타는 타면기를 설치하였는데, 그때는 농가에서 입는 옷감이 밭에서 목화를 재배하여 딴 목화로 만든 무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농가에서 재배하여 딴 목화를 전부 공출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각 농가에서는 공출하고 남은 목화를 집에서 삔 다음 밤이 깊어지면 이것을 방앗간에 가져와서 문을 잠근 채 들키지 않게 가만히 밤새도록 타령기를 솜을 타서 솜을 만들어 날이 새기 전에 다시 시골집으로 허둥지둥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짊어지고 가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각자의 집에서 들키지 않게 숨어서 무명 벼로 짜든가, 출가시키는 딸의 이불 솜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집은 여름철에는 보리방아, 가을부터 겨울이 되면 낮에는 벼의 도정, 밤에는 타면 등으로 항상 집이 복적대고 조용한 날이 없었다.
1941년 4월에 한 동네에 있는 영동농업학교 농업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대개 각도에 농업학교가 1개씩 있었는데, 충청북도에는 청주와 충주에 갑종 5년제 농업학교가 있었으나 지역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어 균형이 잘 안 맞았는지 영동에도 을종인 3년제 농업학교가 몇 년 전에 생겼으니 안성맞춤이었다.
그 당시는 외지에 가서 하숙이나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집이 있는 영동에 학교가 생겼으니 여려가지 형편으로 내가 다니기에는 알맞은 것이다. 이 학교에도 충청북도 전역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농업학교만 졸업하면 면서기나 금융조합 서기는 문제가 없으니 그 당시로는 서기가 되는 것도 상당한 출세를 하는 것이므로 그 입학 경쟁이 상당하였다.
어떤 학부형은 아들의 입학시험에 와서 마침 체력시험으로 철봉에서 턱걸이를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적어도 10개는 해야 하는데, 7, 8개에서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보자 당황하여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면서기다, 하나만 더 하면 면서기다.”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그 학생이 학교에 들어온 후 면서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농업학교이니 농장실습이 많았고, 이에 기숙사도 찰제도라 하여 농가집 모양으로 집이 여러채 드문드문 지어져 있는데, 여기서 여러 학년 학생이 골고루 들어 있어 사단위라 하여 일종의 가정형식을 이루어 실습을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