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에는 정기국회가 개원되었고 12월 1일에는 .75년도 정부예산안이 통과되었는데 그동안 나는 줄곧 국회에 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틈을 내어 지방순시를 하였다. 10월 23일 서울구치소 순시를 시작으로 12월24일 인천검찰청의 순시를 끝으로 전국의 검찰청, 교도소와 소년원을 모두 돌아보았다. 이렇게 전국의 유관기관을 모두 돌아본 법무장관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12월 9일 복역 중이던 전 신민당 의원 김상현, 조연하, 조윤형 씨 등 3인을 가석방하였다. 김상현 씨 한 사람만은 알고 있었을 뿐이고 또 부탁을 받은 일도 없었지만 나는 혼자의 생각으로 이렇게 풀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들은 일이 없다. 그들은 아마 박 대통령이 미운 것처럼 그의 밑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내가 미웠을런지도 모른다.
1975년 (59세) 이 해에는 가족관계로서 기록할 만한 사항은 간단하다.
2월 6일 남채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였다.
8월 4일 이선, 남채, 옥채를 데리고 제주도에 가서 해수욕을 하였다.
10월 24일 이선이 중병에 걸렸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비상대책회의가 끝난 후에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였다. 음력 4월 8일을 공휴일로 정하는 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여 올려 보내면 무조건 결재하겠다는 것이다.
국가원수로서 어느 종교의 편을 들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불탄일을 공휴일로 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심흥선 총무처장관을 통하여 이 날을 공휴일로 하자는 안건을 중앙청 국무회의에 상정하기로 하였다.
1월14일 오전에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이 있었고 오후 3시에 중앙청에서 총리주재의 국무회의가 있었다. 여기에서 위의 안건이 상정되자 김동조 외무부장관이 반대 발언을 하였다. 공휴일이라고 하면 국가 공무원까지도 모두 쉬는 날인데 인도 사람이 주교가 되어 있는 불교의 명절에 왜 모든 국민이 쉬어야 하는지 자기는 반대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는 외국인이 주교가 되어있는 종교를 공휴일로 인정할 수 없다면 유대인이 교주로 되어 있는 기독교의 성탄절인 크리스마스도 공휴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김 외무는 크리스마스는 일제 때부터 공휴일로 되어 있었으니 그대로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좀 더 단호하게 말하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김 장관이 어찌 그리 모르십니까? 12월 25일을 일본인이 공휴일로 하였던 것은 이 날이 그들 대정천황의 기일이었기 때문이지 크리스마스 때문은 아니었지요, 다만 당시의 조선인이 이 날을 크리스마스라고 사실상 불러왔을 뿐 일제 때에도 크리스마스라는 명목으로 일본인이 쉰 것은 아니고 그리고 대정천황제사가 없어진 오늘의 일본에서는 12월25일은 공휴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발언이 나왔다.
“공휴일로 하여 전 국민이 쉰다면 경제 건설에 지장이 있는데 새삼스럽게 공휴일을 늘리자는 데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경제 건설을 이유로든다면 크리스마스 공휴제도 폐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종교인구를 보면 기독교인 보다 불교인이 훨씬 더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기독교의 명절만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종교에 차별을 두는 것이요, 따라서 헌법위반의 처사가 됩니다. 둘 다 인정하든가 아니면 둘 다 폐지해야 합니다.”
이때 김종필 총리가 중재발언을 하였다.
“의견 조정이 안 되시는 모양인데 이 안건은 이렇게 처리합시다. 지금까지 5월5일을 어린이날이라고 불러왔지만 공휴일은 아니었는데 이 날을 공휴일로 하여 함께 공포합시다. 기독교인들도 이날 하루를 자녀들과 함께 집에서 보내면서 쉬라고 하면 싫다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오신 날과 어린이날을 모두 공휴일로 하는 안건을 통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없지요.”
김 외무의 눈치를 보면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 총리는 땅하고 사회봉을 힘차게 세 번 두들겼다. 이 안건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대통령은 즉시 이것을 공포하였다. 이리하여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제는 세계에서도 전례가 없이 우리나라에서 실시되기에 이른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제가 공포되자 불교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그리고 이 날이 가까워지자 나는 대대적인 특별가석방을 실시하였다. 지금 까지는 8.15와 크리스마스에만 특별 가석방을 해왔던 것인데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무회의에 사전 협의를 하면 반대하는 의견이 나올지도 몰라 나는 법무부장관의 단독 권한으로 이 일을 처리하였다. 이리하여 5월 17일에 2,381명을 가석방하였다. 불교인들은 역시 대환영이었다. 그리고 이 전통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켜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