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박성용 명예회장과 나는 (경영)자금 조달을 위해 함께 외국출장을 다녀왔다. 그때 인상적인 경험이 하나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1997년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촉발된 동남아의 통화위기는 여러 아시아국가로 파급되었다. 이들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30%~40% 평가절하 되면서 신용 경색을 발생시켰고 이로 인한 신용불량은 국제자본의 자본 회수 움직임으로 이어져 아시아 국가들은 단기 외채시장에서의 차입 연장 등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업은 신용경색과 외채상환 연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금호아시아나 그룹도 자금난에 직면했다. 그런 사정이어서 박성용 명예회장과 나는 일차 싱가포르로 가서 큰 자본가로 알려진 <상그릴라(Shangrila)> 호텔체인의 회장을 만났다.
우리의 자금 요청에 대해 상그릴라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You know, Mr. Park, when a big ship is sinking, you should never go near to it.”
그는 IMF를 맞은 한국을 가라앉는 큰 배로 생각하고, ‘그 옆에 작은 배가 얼씬거리다가는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한 것이다. 명언이었고,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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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년 박성용 회장과 중국 황화(黃華) 전 총리 겸 외무장관 자택으로 병문안을 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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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우리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석유(日本石油)회사>의 기무라 이치소(木村一三)회장의 알선으로 <스미도모(住友)은행>의 이베(伊部) 회장을 만났다.
우리는 일본식 음식점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때 이베 회장이 자기의 부친이 김옥균(金玉均ㆍ1851~1894)을 매우 존경하고, 숭배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박 명예회장과 나는 의아해서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 분은 자기 성의 ‘이베(伊部)’는 원래 백제(百濟)에서 건너 온 ‘윤(尹)’씨라는 것이었다. 이베라는 ‘이(伊)’자에서 ‘인(人)’변을 빼면 ‘윤(尹)’이 되고, ‘베(部)’라는 것은 도래인들의 전문(專門)집단을 뜻한다는 것이다. 즉 <윤씨 집단>, 또는 <윤씨 마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베 씨의 고백에 놀랐다. 그런데 그 말에 더 놀란 사람은 동석한 옆 자리의 기무라 회장이었다. 이베 회장과는 30년 지기인데 오늘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백제후손인줄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별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지만, 이베 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사실 박 명예회장과 나는 경영활동보다는 세상사를 논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대개 박 명예회장이 내 방에 자주 찾아왔고, 우리는 경영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세상 돌아가는 이런저런 방담을 나누었다.
1997, 8년 즈음, 박 명예회장은 모친을 모시고 살고 싶어 했고, 공기 좋은 곳에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아래윗집에 같이 집을 지어 이웃하여 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어머니 사시기 좋은 그런 조용한 데를 찾아봐야겠어요. 그런 곳에 집을 지어 같이 가서 삽시다!”
좋은 제안이었다. 우리는 서초동의 <정신문화원>이 있는 청계산 뒤쪽에 후보지를 물색하기도 했다. 결국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박 회장의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갸륵한 효심’과 더불어 ‘친구끼리 벗해가면서 공기 좋은 데 가서 함께 살자’는 나와의 말년 계획은 ‘관포지교(管鮑之交)’같은 우정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