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휴전직후, 나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전쟁의 참상은 비참했다. 생(生)과 사(死)를 경계 짓기 어려운 참상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리고 난 후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삶의 지표를 찾아야 했다.
내 나이 스물 하나……. 나이로도 그랬겠지만 시대상황은 미래를 향한 결단을 요구했다. 그것은 청춘의 꿈만이 아니었다. 냉혹한 현실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때만큼 결단을 위한 번민이 컸던 적도 없었으리라. 전후 허무주의적인 경향도 있었지만 나는 미래지향적이었고 포부가 컸다.
1951년, 나는 수원(水原)에 있던 전시연합대학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을 거치며 2년여를 수학할 즈음 나는 전공과목에 대해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이때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에는 당대의 유명한 석학인 이양하(李敭河), 권중휘(權重輝), 송욱(宋稶) 교수 등이 있었고, 나는 이들로부터 ‘세익스피어’와 ‘T. S. 엘리엇’ 등 고전과 현대영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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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시절 (앞줄의 왼쭉 5째부터 이양하, 권중휘, 송욱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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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을 넘어 1953년,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열리며 전쟁은 소강국면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쟁의 참화 속에 영문학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이런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하루는 권중휘 선생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 놓았다. “저는 영문학보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하니, 권중휘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나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죽느냐 사느냐 아우성인데 영문학이 이 전란(戰亂)의 사회와 삶에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어떤 면에서는 실존적 고민이었지만 진로(進路)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당시 이런 고민을 터놓고 얘기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훗날 한양대 교수,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 울산대 총장을 지낸 구본호(具本湖) 박사이다. 그와 나는 영문학과에서 동문수학하며 같은 고민을 나누었고 우리는 고시공부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고시 공부가 우리들의 근본적인 고민을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고시 응시를 포기하고 유학의 길을 택하기로 최종 정리를 했다.
당시 상대생이었던 정소영(鄭韶永ㆍ훗날 청와대 경제수석, 농림부 장관 역임)씨가 우리 하숙집에 자주 놀러왔는데, 그는 유학 얘기를 자주 했다. 구본호와 정소영은 동향(同鄕)의 대구 출신으로 경북고 동기동창이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53년이었을 것이다. 교수들의 인솔 아래 영문학과 학생들이 부산 동래로 소풍을 간적이 있었다. 그때 자유토론처럼 학생들과 교수들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나는 이때 “문학이라는 것도 물적 토대 없이는 어려운 것 아니냐? 나는 문학을 접고 유학을 떠나지만 여러분이 문학을 하는데, 토대를 만들어 주겠다”고 호언을 했다. 그때 이양하 선생 외 여러분들이 “좋은 얘기”라며 껄껄 웃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는 영문학을 접었다. 그리고 유학……. 그것은 전후, 국가적인 화두가 되었던 ‘재건’이라는 명제 속에서 내린 답안이기도 했다. 1953년 7월, 휴전을 하자 화두로 떠 오른 것은 경제재건이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경제적 토대가 송두리째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의식주가 모든 가치를 우선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경제 토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나한테도, 나라에도 별 도움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서울대 문리대는 대학 중의 대학이라 하여 선망의 대상이었고, ‘대학’은 ‘서울대’, ‘서울대’에서도 ‘문리대’였다. 따라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상과대학보다는 문리대를 택하던 시절이었다.
1954년 나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나 첨언하면,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승학(承鶴)형님의 아낌없는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본호와의 교유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거니와, 먼저 유학을 간 내가 ‘자네 거기서 고민하지 말고, 빨리 미국으로 오라’는 편지와 함께 미네소타 대학의 입학원서를 보내주었다. 얼마 후 그도 미국으로 건너와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