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 대회(大會)-2 (110회)
  제13장 보사부장관 시절

이와 같은 의무지원(醫務支援)을 하기위하여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는 83년 9월에 의무전문위원회(醫務專門委員會)를 구성하였고, 84년 4월에는 약물분석기관(藥物分析機關)을 결정하는 한편, 7월에는 미국 LA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86년 1월에는 영동 세브란스병원 등 25개 병원을 86의무지원병원(醫務支援病院)으로 지정하였고 87년 2월에는 선수촌 전담병원으로 인제대학(仁濟大學) 부속 서울병원과 경희대 한방병원(慶熙大 漢方病院)을 지정하였다. 87년 4월에는 각 경기장 및 행사장별 올림픽 지원병원으로 40개 병원을 지정하였고, 6월에는 선수촌 병원 운영협의회(運營協議會)가 설치되었다.

의무지원조직(醫務支援組織)은 86년 4월 의무담당관실이 설립될 때까지 경기장에 소속되어 있었다. 초대 의무담당으로는 당시 서울검역소장(檢疫所長)이던 조병윤(趙炳倫) 박사가 취임하였다. 의무담당관실(醫務擔當官室)은 87년 2월 SLOOC 사무처의 직제 개편으로 의무국으로 되고 그 아래에 의무지원과와 환경보건과를 두었다. 한편, 사무처 직제에 의한 인력만으로는 막대한 업무량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보사부로부터 공중보건의(公衆保健醫) 등의 지원을 받았다.

의무국(醫務局)은 각 경기장 및 행사장의 의무부서를 총괄 관리하고 의무인력과 물자를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하여 대회가 열리기 2개월 전 즉 88년 7월부터 의무지원단(醫務支援團)조직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각 경기장 및 행사장에는 올림픽 지원병원으로 지정된 병원의 의사를 의무담당관이나 의무부장으로 보임하여 각 장소에서 발생하는 진료(診療)서비스를 총괄하게 하였다.

선수촌에는 선수촌병원(Olympic Village Medical Center)을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86아시안 게임 때의 경험자를 중심으로 87년 1월에 준비팀이 구성된데 이어 87년 6월에 선수촌병원(選手村病院) 운영협의회가 15명으로 출범되었는데 협의회장으로는 86선수촌병원장으로 활약한 바 있는 김용완(金容完) 박사(당시 백(白)병원 부원장)가 취임하였다.

88년 9월 2일에는 선수촌병원의 개원식이 거행되었고, 5일에는 사마란치 IOC위원장, 13일에는 IOC 의무분과위원이 내원(內院)하는 등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병원장은 백병원(白病院) 김용완(金容完) 박사, 부원장은 경찰병원(警察病院)의 하권익(河權益) 박사가 맡았다. 내과(內科), 일반외과(一般外科), 정형외과(整形外科), 이비인후과(耳鼻咽喉科), 피부과(皮膚科), 안과(眼科), 치과(齒科), 스포츠치료부 외에 침구과가 설치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용의주도한 준비와 의료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수행케 한데 관하여는 더 설명할 나위가 없다. 특히 42개의 지원병원(支援病院)과 보사부(保社部), 국방부(國防部),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 한국선수(韓國選手) 트레이너협회(協會) 등의 아낌없는 지원과 자원봉사자(自願奉仕者)의 헌신적인 봉사는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의무분야에서도 올림픽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었고, 소중한 경험을 쌓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잊히지 않는 두 가지에 관하여 적어본다. 그 하나는 구급차(救急車)(ambulance)문제였다. 실제로 우리나라 의료분야에서 맹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사실의 하나가 응급치료체계(應急治療體系)의 불비(不備)이다. 선진국에 비하면 지나치게 뒤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교통사고나 심장병 응급환자(應急患者)에 대비해야 하는 문제는 평상시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올림픽을 맞이하게 되니 이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LA 대회에서는 구급차(救急車) 운영회사에 용역을 주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와 같은 운영방법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조직위원회에서 구급차와 심장세동기(心臟細動器)(defibrillator), 산소흡입기(酸素吸入器)(oxygensuction portable) 등의 응급의료장비와 의료인력을 마련하고 운영을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존의 국산 응급차는 차체의 진동, 소음이 심하고 차내 공간이 좁아서 진료가 불편하며 지원시설이 갖추어져 잇지 않아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86아시안 경기대회를 준비할 때부터 지적되어 왔으며, 그 해결책으로 외제구급차의 도입필요성이 주장되어 8개의 외제구급차가 병원부담으로 수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올림픽대회에 필요한 구급차를 전부 수입할 수는 없는 일이며, 조직위원회(組織委員會)에서는 국내 기업체에 개량형 구급차를 제작하도록 하였지만 노사분규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회기간 중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지원병원(支援病院)으로부터 42대, 국방부(國防部)로부터는 12대, 서울시 소방본부(消防本部)로부터 10대를 지원받아 각 경기장, 행사장에는 물론 도로경기장, 승마경기장에 배치하였다. 특히 승마경기장은 지형이 험한 관계로 4륜구동 구급차가 필요하였으나 민간보유의 4륜구동 구급차가 없어서 국방부(國防部)의 야전구급차(野戰救急車)(field ambulance)를 지원받기도 하였다.

구급차(救急車) 문제는 대단히 예민하였으며 IOC의 의무위원회에서도 관심이 컸고 현지조사(現地調査)도 하였다. 특히 IOC위원들 중에는 고령의 인사가 많아서 만일의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했다. 선수나 관객에 대하여도 그렇지만 대회 임원이나 IOC위원 중에 만의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외신기자(外信記者)들도 응급치료문제 특히 구급차(救急車)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는데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이 능란한 설명으로 잘 넘긴 일은 식자들이 주지(周知)하고 있는 바이다. 어쨌든 올림픽기간 중 아무런 사고가 없었던 일은 두고두고 고맙고 기쁘게 생각할 따름이다.

둘째로는 약물검사(藥物檢査) 문제이다. 올림픽대회에 대비하여 관계부처 인사들로 구성된 실행위원회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으며, 그 결과를 국무회의(國務會議)에 보고하는 것이 상례였다. 보사부장관(保社部長官)으로 입각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열린 국무회의에서의 일이다. 이 관(李  寬) 과기처장관(科技處長官)이 약물검사센터(doping center)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순간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약물검사(藥物檢査)는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과기처(科技處)에서 보고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李)장관이나 내 자신이나 입각해서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언제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는지 궁금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고가 끝나자마자 국무회의(國務會議)를 주재하던 이현재(李賢宰) 총리에게 질문하였다. 약물검사(藥物檢査)는 엄연히 보사부 소관(保社部 所管)이라고 판단되는데 과기처(科技處)에서 보고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내용이었다. 이(李)총리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자세한 것을 알아보자고 했다. 혹시나 해서 조상호(曺相鎬) 체육부장관(體育部長官)에게도 물었다. 조(曺)장관은 체육부장관(體育部長官)으로서 이미 상당한 기간 근무해온 바가 있어서 경위를 알고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역시 조사해 보겠다는 답변이었다.

귀청(歸廳)후에 보사부 간부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였더니 이미 4년 전에 결정이 난 일이라고 했다. 4년 전에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약물검사(藥物檢査)센터를 놓고 그 설치장소를 물색하였는데 국립보건원(國立保健院)과 과기처(科技處) 등이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분야의 전문가나 시설이 전무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국립보건원(國立保健院)에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제의를 거절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과기원(科技院)으로 낙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때부터 인력을 보강하고 시설을 마련하였더라면 국립보건원이나 보사부가 얼마나 빛났겠느냐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사실상 과기원에서는 새롭게 인력을 양성하고 시설을 확보하여 눈부신 발전을 하였고, 마침내 IOC로부터 공식으로 승인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의 입장이 어려워졌다. 전후 사정도 모르고 총리(總理), 과기처장관(科技處長官), 체육부장관(體育部長官)에게 비난조의 질문을 던졌던 것이니 죄송하기 짝이 없다. 곧 과기처장관(科技處長官)에게 사과 전화를 올렸다. 체육부장관(體育部長官)은 일부러 자신이 알아본 결과를 나에게 알려왔다. 총리(總理)에게는 직접 찾아가서 전후 사정을 설명하였다.

사실상 세 사람이 다 같이 몰랐던 일이 명백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내 자신의 심정은 상당히 불편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어찌하여 놓쳤는가 하고 한탄했지만 이미 다 지난 이야기다. 보사부 간부들에게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심경을 털어 놓았다. 이렇게 훌륭한 호기(好機)가 찾아왔는데도 이것을 쫓아버리는 환경에서 어떻게 보사부(保社部)가 부각되겠는가 하고 꾸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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