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회원국이 아닌 우리나라가 UN 산하국과 관계를 맺은 최초의 기관이 세계보건기구(世界保健機構)(WHO)인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많은 인사들이 WHO 장학생(獎學生)으로 외국에 유학했고 또 국내 보건사업(保健事業)에 있어서도 WHO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근래에 와서 우리 경제력과 더불어 국력이 신장되어 WHO에 대한 고마움이 퇴색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기도 하지만 WHO에 대한 관심은 식자(識者)들 사이에서 여전히 높다.
WHO는 전 세계를 6개 지역으로 나누고 지역마다 사무처를 두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서태평양 지역(西太平洋 地域)에 속하고 있으며 사무처는 ‘마닐라’에 있다. 서태평양 지역은 24개국(현재는 28개국)으로 성립되어 있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日本), 중국(中國), 호주(濠洲) 등이 회원국이다. 북한(北韓)은 ‘뉴델리’에 사무처를 두고 있는 동남아 지역(東南亞 地域)에 속하고 있다.
서태평양 지역의 사무처장으로는 Fang 박사(중국(中國)), Dy 박사(필리핀)에 이어서 나카시마(中島)박사(일본(日本))가 있었는데, 1988년에 나카시마(中島)박사가 WHO본부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임기 5년의 사무처장직은 연임이 가능하며 회원국의 투표에 의해서 선출된다.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는 직책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정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과거의 실정이었다. 국토가 양분되어 있고 공산국가가 상당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위상(位相)이 국제적으로 상승되고 특히 올림픽 개최국으로 되는 등 눈부신 신장세를 보이게 되자 욕심이 생겼다. 본부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일본의 나카시마(中島) 박사의 후임으로 한상태(韓相泰) 박사를 추대해보자는 욕심이 바로 그것이다.
1987년 말에 한상태(韓相泰) 박사 후원회를 조직하고 내가 회장이 되었다. 뜻있는 인사들이 힘을 합해서 노력해보자는 모임이다. 한(韓)박사는 이미 20여 년 전에 보사부(保社部)에서 보건국장직을 지낸 후에 WHO에 참여하여 사무처의 차석(次席)인 Director of Programme Management의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어느 모로 보거나 후임 처장으로는 적격자라고 판단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뜻있는 인사들의 판단이었을 뿐 여러 가지 문제가 가로막고 있었다. 우선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국제적으로 지지가 있어야 한다. 후원회가 탄생은 했지만 묘책(妙策)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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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o 서태평양 지역 나카시마(中島) 사무처장의 예방을 받고 / 서울대 총장 시절이다(1980.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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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었다. 1988년 2월 25일에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뜻하지 않게 나는 보사부(保社部)장관으로 입각하게 되었다. 입각(入閣)하자마자 이 일만은 꼭 성사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후원회장직을 가톨릭태학의 조규상(曺圭常) 교수에게 넘기고 측면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서울의대 신영수(申英秀) 교수가 총무를 맡고 정부에서는 이성우(李晟雨) 보건국장이 창구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후원회는 의외로 성황을 이루었다. 많은 의약인과 독지가들의 참여가 있었으며 모금액도 계획했던 액수를 훨씬 초과하였다. 나는 측면에서 지원하였는데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난관에 봉착하였다. 외무부(外務部)에서 적극적이 아닌 것이다. WHO에 관한 일이 내용적으로는 보사부(保社部)의 일이지만 행정상으로는 외무부의 소관이며 외무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성사될 수가 없었다. 외무부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미 1년 전에 ‘말레이지아’에서 출마표명(出馬表明)이 있었는데 ‘말레이지아’가 영연방국(英聯邦國)인데다가 ‘아세안’의 회원국인 까닭에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외교가 ‘give and take'를 원칙으로 하는데 ’말레이지아‘에 대해서 이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외무부에서도 여러 채널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라서 정책이나 방침을 세우는 것이니 일단 결정 난 것을 번복하기 힘들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들의 욕망을 관철해야겠다는 의지는 변할 수가 없었다.
‘말레이지아’에서 출마(出馬)하게 되어 있는 ‘칼리드’ 박사는 보건성(保健省)의 보건책임자인데 이미 1년 전부터 각국에 공한을 보내는 등 착실하게 선거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말레이지아’의 수상이 의사 출신이고 당사자인 ‘칼리드’ 박사가 귀족의 한 사람이고 해서 ‘말레이지아’에서는 정식으로 각의에서 의결을 한 것으로 전문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각의(閣議)는커녕 기초작업도 제대로 돼있지 못한 실정이었으니 일부에서 비관론이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궁리 끝에 최광수(崔侊洙) 외무부장관을 찾아갔다. 최(崔)장관과는 중학교의 선후배 관계였었고 부인과 집사람도 잘 알고 있던 처지여서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그러나 한(韓)박사 문제에 대해서는 선뜻 언질을 주려하지 않았다.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여러 나라의 정보를 분석해 본 결과 승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역시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시기적으로도 늦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큰 약점이었다. ‘말레이지아’후보는 일찍 출마표명(出馬表明)을 할 수 있었지만 한(韓)박사의 경우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서태평양 지역 사무처장이던 나카시마(中島)박사가 총장으로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한(韓)박사는 그의 거취에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최(崔)장관을 방문한 끝에 함께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직접 각국공관을 통하여 연락을 맡았던 당시의 국제조약국장 김세택(金世澤)씨도 점차 적극적으로 공세를 펴는 쪽으로 방향을 굳히게 되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겠다는 것이 나의 계산이었다.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공관장(公舘長)회의 때에는 관련 공관장들을 모시고 배경설명을 하기도 하였다. 5월에는 연례행사로 WHO총회가 열린다. 나는 이성우(李晟雨) 국장과 이홍윤(李弘允) 국제협력과장 등을 대동하고 제41차 WHO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4월 29일 ‘제네바’로 떠났다. 후원회장인 조규상(曺圭常) 박사와 외무부 직원도 동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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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상태 박사(왼쪽)의 WHO 서태평양지역 취임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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