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에서는 이상옥(李相玉) 대사와 대표부 직원 2명이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우리나라 수석대표로서 기조연설을 하였는데 올림픽 주최국이라는 사실이 연설내용을 훨씬 값지고 영향력 있게 했던 것을 회상하며 올림픽이 모든 면에서 크게 도움을 주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입장에서는 상례적인 총회 일정이나 의제 토의보다 차기 서태평양 지역 사무처장 선출문제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부각시키느냐에 더욱 관심이 깊었다. 숙의 끝에 계획했던 일이지만 5월 30일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서태평양 지역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가졌다.
인터컨티넨탈호텔은 ‘제네바’에서 최고급호텔이다. 모든 나라의 대표가 참석해 주었다. 중국에서는 보건장관이 수석대표로 총회에 와 있었는데 국교관계로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사전 양해한 바 있다. 중국대표 일행을 다음날 한상태(韓相泰) 박사가 오찬에 초대하였는데, 이때에는 전원이 참석했던 것으로 들었다. 한(韓)박사가 UN직원의 입장이기 때문에 국적이 문제되지 않은 것이다.
만찬회에서 나는 우리 정부도 차기 사무처장 후보를 출마시키겠다는 것을 인사말을 통하여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이것이 한(韓)박사를 출마시키겠다는 최초의 공식발표였다. 그때부터 선거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음날 저녁에는 ‘말레이지아’ 보건장관이 ‘돈황(敦煌)’이라는 중국식당에서 만찬회를 열었다. 이 만찬회에 참석한 인사들은 전날 우리가 초대했던 분들과 같았지만 몇 사람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 모임에서 중국 보건장관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韓)박사 출마에 관하여 설명하였고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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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상태 박사와 함께 (1977. 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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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협조는 기권표를 던지는 일이다. 중국이 우리에게 찬표를 던질 수는 없는 일이며, 기권만 해준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를 도와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말레이지아’ 보건장관이 중국계(中國系)여서 다소 걱정을 하기도 했으나 중국 보건장관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이 만찬회의 분위기는 우리가 주최했던 전날 만찬회의 분위기에 비해서 뒤진 것이 분명했다. 점차로 자신감이 일기 시작하였다.
5월 4일에는 나카시마(中島) 총장에 대한 인준 투표(認准 投票)가 있었다. 160여 개국의 대표가 비밀투표를 하였는데 부표가 한 표 나왔을 뿐이다. 일본대표들의 흥분은 볼만하였다. 일본으로서는 UN의 기관장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것이니 그럴만하다. 인준이 끝난 후 나카시마(中島) 박사에 대한 축하인사가 시작되었다. 신청순(申請順)대로 진행되었는데 나는 일곱 번째로 인사를 하였다. 축하인사만도 수 시간이 걸렸다. 국제무대에서의 축하행사를 직접 겪고 보니 어떻게 해서든지 한(韓)박사를 당선시켜야 되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제네바’에 1주일 있는 동안은 서태평양 지역의 대표들을 만나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면서 환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몸소 경험했다. 매일 손님을 대하고 식사하는 일이 겉에서 보기에는 부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셈이다.
귀로에는 ‘런던’에 들러서 영국 보건성(保健省)을 방문하게 되어 있었다. ‘말레이지아’가 영연방국(英聯邦國)인 까닭에 나의 입장에서는 한마디 조언을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오재희(吳在熙) 주영대사(駐英大使)와 이성우(李晟雨) 국장과 함께 외교담당차관인 ‘스켈머스데일’경(Lord Roger Skelmersdale)을 만났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말레이지아’를 지지할 수 있겠지만 ‘말레이지아’ 외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달라는 것이 나의 부탁이었다.
그런데 오(吳)대사가 귀띔을 해준다. 둘이서 대화를 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점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공식석상에서는 점잖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사석에서는 그렇게 하면 손해를 본다는 이야기다. 조언을 듣고 나도 말을 바꾸었다. 한(韓)박사를 꼭 지지해 달라고 했다. ‘말레이지아’의 출마 예정자인 ‘칼리드’ 박사와 비교해 보면 한(韓)박사 쪽이 월등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인물주의로 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처리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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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상태 씨는 WHO 서태평양 사무처장을 연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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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행에는 또 하나 예기치 않았던 일이 생겼다. ‘제네바’에서 ‘런던’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데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으니까 바로 옆자리에 중국 보건장관(中國 保健長官)이 왔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중국의 의학교육제도(醫學敎育制度), 의료제도(醫療制度) 등 여러 가지에 관하여 설명을 들었다. 나는 중국에 관하여 잘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제까지 여기저기서 전문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소재를 삼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나라 의학교육(醫學敎育)을 지원해 주었던 China Medical Board에 관하여도 많은 의견을 교환하였다.
우연한 일치였지만 ‘런던’에서도 양측이 다같이 Park Hotel에 투숙하였다. 영국의 외무성이 주선한 것이며 ‘런던’비행장에 도착하고 보니 의전반(儀典班) 두 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대표단과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호텔에서 3박하는 동안 매일 아침 조찬 때마다 부딪쳤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가까워졌다. 한(韓)박사 출마 문제에 관하여 기회가 있는 대로 상기시킨 것은 물론이다. 올림픽에 초청하겠다고 제의하였더니 9월의 ‘마닐라’에서 열리는 WHO서태지역이사회의 의장인 관계로 시간상 불가능하다며 오히려 나에게 ‘마닐라’로 오도록 권유하였다.
이 이사회(理事會)에서 차기 사무처장을 선출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런던’을 떠난 후의 여행일정까지 이야기 해 주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마음을 놓은 모양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여행일정을 밝히지 않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나도 다소는 안심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