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공화국 초대 내각(第6共和國 初代內閣)은 88년 12월 5일에 개각(改閣)되었다. 이현재 총리(李賢宰 總理) 후임으로 강영훈(姜永勳) 의원이 임명되고 대부분의 각료가 바뀌었다. 부총리(副總理)에는 나웅배(羅雄培) 박사 후임으로 조 순(趙 淳) 교수가 임명되었고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에 김영식 장관(金永植 長官) 후임(後任)으로 정원식 교수(鄭元植 敎授), 보사부장관(保社部長官)으로 본인에 이어 문태준(文太俊) 박사가 임명되었다. 총무처(總務處)의 김용갑(金容甲) 장관, 동자부(動資部)의 이봉서(李鳳瑞) 장관, 통일원(統一院)의 이홍구(李洪九) 장관, 법제처(法制處)의 현홍주(玄鴻柱) 처장을 제외한 전원이 바뀌었다. 서울시의 김용래(金庸來) 시장도 바뀌었는데 수개월 후 자진 사퇴한 김용갑(金容甲) 장관의 후임으로 총무처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폭개각이냐 소폭개각이냐 의론이 분분했지만 국정쇄신(國政刷新)의 차원에서 대폭개각이 단행된 것이다.
제6공화국(第6共和國) 초대 내각에 몸담았던 분들이 구성원이 되어 6초회(初會)가 만들어졌는데 이 모임은 월 1회 골프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구회(舊懷)를 나누는 일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현재(李賢宰) 전 총리가 회장직을 맡고 있다.
오래간만에 공직을 떠난 셈이다. 몇몇 대학에서 총장이나 교수로 초청하겠다는 제의도 있었다. 원래가 대학에서 생활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한참 생각 중에 있었는데 녹십자(綠十字)에서 회장으로 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기업에는 전연 지식이 없고 또한 대학생활을 해오던 사람이 기업체에 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현재(李賢宰) 전 총리와는 빈번하게 만났고 또 앞으로의 진로문제에 관하여도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녹십자(綠十字)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이었다. 녹십자(綠十字)가 독특한 스타일의 경영을 하고 있으며 대단히 건실한 업체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렇게 해서 녹십자에 가기로 작심했고 12월 30일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허영섭(許永燮) 사장의 춘부장이신 허채경(許采卿) 한일(韓一)시멘트 회장, 녹십자(綠十字) 전 회장 김덕문(金德門) 선생, 그리고 허(許)사장과 회동하여 정식으로 소신을 밝혔다. 취임식은 다음해 즉, 89년 1월 4일 시무식(始務式) 때 사내 행사(社內 行事)로 치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정초에 당시 보사부 차관(保社部 次官)이던 이두호(李斗頀) 박사가 신년 인사차 찾아왔는데 1월 4일 취임식은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나의 녹십자회장(綠十字會長) 취임이 정부 공직자 윤리법(政府 公職者 倫理法)에 위반되며 동 윤리위원회(同 倫理委員會)에서 승인을 받지 않고는 취임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자신이 83년 1월부터 85년 2월까지 즉, 서울대(大) 총장(總長) 말기부터 문교부 장관(文敎部 長官)시절에 걸쳐서 공직자 윤리 위원회 위원이었던 것이 회상된다. 해당 안건이 거의 없어서 이 위원회가 잘 열리지 않았던 까닭에 그 존재를 망각했던 것이다.
며칠 후 이(李)차관이 약속한 대로 보사부 전계휴(全啓烋) 총무과장이 해당 서류를 가지고 왔으며 보사부와 녹십자가 해결하겠으니 그리 알아달라고 이야기 한다.
나의 일 때문에 보사부(保社部)의 진 강(陳 剛) 약정국장이나, 김도석(金道石) 약무제도과장, 녹십자(綠十字)의 유원창(劉元昌) 전무 등이 상당히 시간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후에 들었다. 문태준(文泰俊) 보사장관, 이두호(李斗頀) 차관, 윤성태(尹成泰) 기획관리실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6초회(初會) 간사였던 당시 김용갑(金容甲) 총무처장관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이런 과정을 겪은 후 1월 25일에 녹십자회장으로 허가한다는 윤리위원회 위원장(倫理委員會 委員長) 공문을 받았다.
2월 1일에 취임식을 갖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세계보건기구(世界保健機構) 서태평양지역(西太平洋地域) 한상태(韓相泰) 박사의 사무처장 취임식이 이날 있었기 때문에, 축하차 마닐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귀국 후 2월 9일 취임식을 가졌다. 사내(社內) 행사로 하기로 했던 까닭에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이현재(李賢宰) 전 총리, 이광호(李洸鎬) 서울의대 학장, 한용철(韓鏞徹) 서울대학교 병원장, 정문식(鄭文植) 서울대 보건대학원장, 이영기(李榮基) 서울대 명예교수, 강명규(姜命圭) 서울대 경제학 교수, 구도서(具燾書) 대한보건협회(大韓保健協會) 이사장, 김대규(金大奎) 대한결핵협회(大韓結核協會) 사무총장 등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격려차 내방해 주어 놀라기도 하였다.
녹십자(綠十字)의 월간사지(月刊社誌) “사랑방 우물가” 89년 3월호에 실린 취임사(就任辭)를 전재한다.
녹십자는 예방의학을 구체화 시키는 곳
안녕하십니까, 녹십자가족 여러분.
저는 짧은 행정부 재직기간을 빼면 거의 평생을 학계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 저를 녹십자가족으로서 불러주신 허영섭 사장께 우선 감사합니다.
평소 저는 인간에게 있어서 건강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또한 그 인류 건강을 증진시키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예방의학이라는 소신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보사부장관직을 떠난 뒤 다시 학계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허영섭 사장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미 전부터 녹십자는 예방의학을 구체화시켜 소중한 의약품을 만드는 회사라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오던 터라 학계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뜻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 이현재(李賢宰) 전 총리께 상의를 드렸더니 ‘녹십자는 학문의 연장이라 할 정도로 독특하므로, 거기 가서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하면서 적극 권장을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제가 이 자리에 설 용기를 내었습니다.
저는 아직 녹십자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허(許)사장께서 주신 『녹십자 20년』에 담긴 녹십자 성장의 눈물겨운 역사를 보고 나서 그 산 역사의 현장이었던 신갈공장을 사장과 함께 둘러보면서 매우 큰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회사를 사랑하는 진정한 애사심(愛社心)이었습니다. 원래 생물학적 제재는 그 생산이 까다로워 남모르게 겪는 고생이 많을 것으로 압니다만, 그런데도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고 계신 녹십자 가족들을 보면서 저는 제가 녹십자에 대해서 예측했던 것이 완전히 사실과 부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녹십자 20년』을 보면서 비로소 ‘녹색 십자가의 의미’와 그 의미에 맞게 생활해 가는 녹십자가족들의 의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번영과 평화 ·풍요를 의미하는 녹색은 바로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척의지의 표현이며, 봉사 · 희생 · 사랑으로 설명되는 십자는 또한 남을 돕고 궂은일을 몸소 실행해 가면서 보람을 찾는 실천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제 자신도 이제 ‘녹십자’라는 칭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 안 드릴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비록 큰 도움은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우리 녹십자가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할 것임을 다짐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제 나름대로의 조직의 철학을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화입니다.
녹십자 사훈 첫 번째에도 나와 있는 인화는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학교나 직장에서까지 어느 조직체에서건 가장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녹십자가족들의 경우 이직률이 아주 낮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녹십자가족들은 이러한 인화를 바탕으로 언제나 녹십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해야겠습니다.
바야흐로 현대는 경쟁시대입니다. 경쟁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 경쟁력을 배양해서 이겨나가야 합니다. 우리 녹십자가족 자신들이 힘을 모아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회사를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현대는 국제화(國際化) 시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국제적인 신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WHO와 같은 국제기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앞으로 저는 이 분야에서 노력을 해 나가겠습니다.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다면 우리 앞에는 반드시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기업이 무엇인지, 기업문화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녹십자가족(綠十字家族)이 되었으니 모르는 것이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배우면서 일한다’는 신조가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석학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 될 뿐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부족한 것을 배워가며 그것을 바탕으로 응용하고 생산해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녹십자의 일은 물론 녹십자 기업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공부해 나가면서 의문이 생길 때는 언제고 여러분들에게 문의하고 주위 분들에게 자문을 받아 가면서 배운 것을 실천해 가겠습니다. 그리하여 보다 건실하고 건강한 녹십자가족이 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금년에 우리 국민들은 예년에 없이 설을 두 번이나 세었습니다. 두 번에 걸쳐 복을 받았으니 예전에 비해 월등히 많은 복을 받은 셈입니다. 녹십자가족 여러분들! 다복(多福)하시고, 녹십자의 앞날에 진정한 영광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녹십자를 위해 헌신해 나갑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