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4월 25일 점심때 통고를 받고 26일 오전에 환경처장관 임명장을 받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환경처장관에 취임하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회상해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취임하기 두어 달 전에 경기도의회(京畿道議會) 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교섭을 받았다. 의장으로 추대한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김포 교육장(金浦 敎育長)이던 이완(彛完) 동생에게 경기도 부지사가 찾아와서 지사의 뜻을 전하고 간 것이 시작이었다. 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생각해 주신데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도저히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리도록 동생에게 부탁했다. 몇 차례 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지만 고사(固辭)하였다.
이 문제는 완전히 매듭을 진 것으로 생각하고 4월 4일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4월 20일 과학의 날 행사가 있었는데,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科總)가 주관하게 되어 있어서 18일 귀국하였다. 원래 과학의 날은 매년 4월 21일인데 이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서 하루를 앞당긴 것이다. 이 행사가 없었더라면 유럽에서 좀 더 긴 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22일 월요일이 되자 경기도의원 출마 문제가 재연되었다. 그대로 있기만 하면 되니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어 달라는 것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민주당(民主黨) 고위층에서 이미 결정한 것이니 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경기도지사이던 이재창(李在昌)씨와 민자당 선거담당 사무차장이던 장경우(張慶宇) 의원이 집요하게 요구해 왔으며 김포 강화(金浦 江華) 출신인 정해남(丁海南) 의원도 같은 뜻을 전해 왔다.
나는 24일 이현재(李賢宰) 전 총리와 박찬무(朴贊武) 을지병원장과 함께 점심을 같이 하면서 신상 문제에 관하여 상의하였다. 두 분 다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나는 이(李)총리에게 정해창(丁海昌)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연락하여 사정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녹십자 집무실로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민자당 정책위의장이던 나웅배(羅雄培) 의원에게도 전화로 상의했다. 나(羅)의장은 자기 소관은 아니지만 잘 알겠다고 했다.
이윽고 정(丁)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李)총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면서도 이해해주는 듯 했다. 대타자를 물색해 보라고 했다.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으니 생각해 보고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다. 내가 문교부장관으로 있을 때 정(丁)실장은 법무부차관이었다. 학원문제로 비교적 정(丁)차관과는 많은 접촉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인품과 두뇌에는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 소탈한 그의 인품과 예리한 두뇌는 누구에게나 훌륭한 인상을 주기에 족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떠 올려보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문교부차관, 충남대 총장, UNESCO 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조성옥(趙成鈺) 박사가 적임자로 생각되었다. 저녁에 정(丁)실장에게 연락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실패했다. 정(丁)실장은 몹시 바빴던 것 같다. 그날 오전에 나는 회의를 사회하고 있었다.
전직 장·차관, 국회의원 등으로 구성된 민자당 정책평가위원회의 사회분과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던 나는 식수(食水)를 주제로 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식당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와 있으니 받아보라고 종업원이 귀띔해 준다. 나의 비서의 전화였는데 정(丁)실장에게 즉시 전화하라는 내용이었다. 곧 전화를 걸었다. 그 전날 저녁과 그날 아침에 연락하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사과하고 대타자로는 조성옥(趙成鈺) 박사를 천거한다고 하였다. 정(丁)실장은 그 문제가 아니라 환경처장관직을 맡아 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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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처장관 임명장을 받고(1991. 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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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3시에는 지난 20일 과학의 날에 표창 받은 분들과 과학계 중진들이 청와대에 초청되어 있었다. 나도 물론 참석하였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께서는 반가이 맞아주시며 환경처장관직을 맡게 되어 반갑다고 격려해 주셨다. 경기도 의회진출을 마다한 처지에서 환경처장관직도 마다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환경처장관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인구(population), 오염(pollution), 빈곤(poverty)을 내용으로 하는 3P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이들 과제를 해결해야 할 임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예방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는 강의 내용에 반드시 3P에 관련된 부분을 포함시켜 왔다. 환경오염에 관해서는 지속적으로 강의를 해 왔기 때문에 생소한 분야는 아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서울의대 잡지에 실렸던 ‘서울시내 공기오염(空氣汚染)에 관한 조사(調査)’라는 논문을 찾아내서 읽어 보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1962년에 당시 나와 함께 서울의대 예방의학 교실에서 연구하고 있었던 김태용(金泰龍) 박사 및 보건대학원의 정문식(鄭文植) 박사와 함께 발표한 것인데 막상 다시 읽어보니 질적으로 대단히 뒤지는 내용이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일찍 발표된 논문이라는 데에 뜻이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환경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이 논문을 마련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누군가가 환경분야를 연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나 자신은 인구를 전공해 왔는데 인구와 환경오염, 그리고 빈곤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논리 이전의 상식이니 만큼 환경오염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나는 환경처장관 자리가 축하받을 만한 자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취임 후 많은 분들이 축하회를 마련해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참석은 했는데 축하한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호된 질타와 비난 일색이었다. 그만큼 환경문제가 절박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였지만 피초청자의 입장에서는 난처할 때가 많았다. 환경문제로 칭찬을 듣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