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一惺) 명주완(明柱完) 선생께서는 1905년 2월 15일에 이 땅에 태어나셨다. 명문가의 후예로 대다난 재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수학분야에서는 천재라고 일컬어졌다. 1923년에 경성의대(京城醫大) 전문학교(專門學校)에 입학하였는데 이것을 마다하고 다음해에는 처음으로 개교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예과(豫科)에 입학하셨다.
당시 예과는 법문과에 80명, 이과에 80명의 학생을 입학시켰는데 그 중 한국인 학생은 법문과에 10, 이과에 12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성진(金晟鎭), 윤봉헌(尹鳳憲), 박건원(朴乾源), 이세규(李世珪), 이정복(李正馥), 이의식(李義植) 등 쟁쟁한 인사들이 동기생이었다.
명(明)선생께서는 학창시절에 사회봉사활동을 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학부 1학년 때에는 수학을 가르친다는 목적으로 정동(貞洞)에 소재한 안민강습소(安民講習所)에서 무료봉사를 하다가 재정난으로 이 강습소가 폐쇄되자 YMCA 청년노동야학교(靑年勞動夜學校)에서 봉사하였다. 수학 교육에 대한 매력도 있었지만 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 철학(哲學)이 그 바탕이었다는 것은 짐작할 만하다.
그러면서도 의학에 대한 정열은 대단했으며 학교 성적은 우수했다. 학부 2학년 때에는 약리학 교실(藥理學 敎室)과 인연을 맺었고 스기하라(杉原 徳行)교수의 지도로 ‘한국인 혈액중 지아스타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의 연구는 졸업 후에도 계속되었다. 1930년에는 ‘aspirin 제제의 흡수와 배설’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博士學位)를 취득(取得)하였다.
1945년 10월 15일에 서울의대 정신과 교수로 취임하셨고 과장으로 임명되셨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정신과 전공의사가 없었던 까닭에 명(明)선생께서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세브란스, 이화대, 여의대, 전남의대 등에 출강하여 명실 공히 우리나라 정신의학의 창설자(創設者) 겸 대부의 역할을 하셨다.
나와의 인연은 명(明)선생께서 정신과 강의를 담당하셨고, 서울의대병원의 초대원장(初代院長)으로 활약하시던 때에 맺어졌다. 사제(師弟)지간의 교분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나는 학생회장이었던 관계로 빈번하게 선생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영향을 받게 된 것은 1956년 8월에 ‘미네소타’대학에서 돌아온 후 12월에 대우조교수(待遇助敎授)로 임명된 때부터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당시 선생께서 김성진(金晟鎭) 선생의 뒤를 이어 학장직에 계셨다. 김(金)선생님의 권유로 귀국하였지만 의대 대우조교수(待遇助敎授)로 임명한 것은 명(明)선생님이었다.
의대에서 일을 하게 된 몇 달 후에 명(明)선생께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일을 맡도록 하라는 분부가 계셨다. 생리학의 한범석(韓凡錫) 선생이 맡고 계셨던 일인데 불원간 미국으로 가시게 되어 있어서 그 후임으로 일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때부터 명(明)선생님을 직접 모시게 되었고 시중을 들게 되었다. ‘미네소타프로젝트’의 통역(通譯)을 하는 일과 명(明)선생 개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그 후 나는 매일같이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나의 주위에는 부지런한 분도 많지만 명(明)선생님을 따르지는 못한다. 선생님 댁이 삼선동(三仙洞)에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일의 하나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른 아침에 ‘클랙슨’이 울리는 일이었다. 새벽에 차를 타고 오셔서 깨우는 것이었다. 전날 맡긴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고 싶다는 말씀이다.
거의 매일같이 숙제를 주시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겨울에는 더욱 어려웠다. 선생님께서는 추위를 타지 않는 분이신데 반해 나는 추위에 몹시 약했다. ‘클랙슨’이 울리면 기민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 일이 나에게는 어려움을 주었다. 당시에는 자동차라고 해봐야 의과대학(醫科大學) 학장(學長) 전용 지프 한 대가 있었는데 그 번호가 서울 721호였던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
|
| ▲ 서울대개교 30주년 기념행사 후 / 오른쪽이 명주완 선생, 가운데는 구연철 교수(1976. 10. 15.) |
|
아침 일찍부터 학장실에서 열리는 ‘미네소타’대학 교수와의 간담회도 회상되는 일의 하나다. 나는 통역을 맡았는데 가끔 지각할 때가 있었다. 미국 교수들도 지각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실수에 대하여 선생님께서는 일언반구 나무라시지 않는다. 그러니 더욱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아무런 정식 보직(補職)없이 선생님을 모시다가 60년 4월에는 의과대학 학생과장 (현재의 학생 담당 학장보)에 임명되었다. 보직에 임명된 후 얼마 안 되어서 나는 ‘미네소타’대학에서 파견되어 있던 골트(N. L. Gault, Jr.)교수 및 버그랜드(Eldon Berglund)교수와 더불어 전남(全南)대학교 의과대학을 방문할 목적으로 광주(光州)에 출장 갔다. 출장지에서 4·19를 맞이하였는데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
당시 전남의대 학감(學監)이었던 동기생 김정진(金楨鎭) 형이 우리들을 맥주집으로 안내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약속한 시간에 김(金)형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당시 광주(光州)에서는 제일급이라는 동명(東明)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이상스럽던 일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하던 버그랜드 박사에게 돌멩이가 날아왔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약속시간보다 훨씬 후에 김(金)형이 나타났다. 대단히 시끄럽다고 하며 외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다. 그 때까지만 해도 4·19를 몰랐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동명(東明)호텔과 광주시장공관(光州市長公舘)이 인접해 있어서 공관에 던진 돌이 호텔 화장실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호텔방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일 저일을 걱정하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다음날 즉 4월 20일 미국인 교수 두 분과 함께 도청(道廳)에 들러서 승용차 한 대를 알선받고 송정리(松汀里)역으로 향했다. 도중 KMAG(미군고문단)에 들러서 헬리콥터를 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상부명령에 따라 병기(兵器)를 움직여서는 안 되게 되었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백발의 미국 육군대령의 모습이 떠오른다.
몇 시간인가 기다리고 있었더니 기차가 온다. 행선지를 모르겠다고 한다. 덮어 놓고 승차했다. 승객은 우리 세 사람과 이미 타고 있었던 두 사람 뿐이었다. 천안(天安)역까지 오더니 더 이상 못 간다고 한다. 택시로 온양(溫陽)으로 가서 관광호텔에 투숙했다. 별천지였다. 전연 바깥 사정을 모르는 듯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날 천안(天安)역으로 갔다. 영등포(永登浦)역까지 간다는 기차에 올랐다. 영등포(永登浦)역에 도착하니 ‘미네소타’ 사절단장이던 슈나이더(Arthur E. Schneider)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온양호텔에서 연락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방향이 다른 이유 때문에 미국인 세 사람과 나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대학에 도착했다. 명(明)학장께서 무던히도 반가워하신다. 고생은 되었겠지만 운은 좋다고 하신다.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학생들은 데모에 나가려하고 교수는 못나가도록 말리게 마련인데 학생과장이 없는지라 교무과장이던 박진영(朴鎭永) 선배께서 학생들을 막았다는 것이다. 4·19가 성공하게 되니 박(朴)선생에게 비난이 온 것이다.
내가 서울에 있었으면 학생들 막는 것도 나의 책임이었고 비난도 나에게 집중되었을 것이다. 명(明)선생께서는 학생을 막는 고생도 안하였으니 운이 좋았고 후에 비난도 안 받게 되었으니 더욱 운이 좋았다고 농반진반의 말씀을 하시며 대소(大笑)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