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도 일에 대한 선생의 집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1977년 8월 26일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나는 위대한 스승을 모시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도 저승에서 부덕한 이 사람을 지도해 주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후일 나는 명주완(明柱完) 선생님의 이모저모란 글을 모 전문지에 실었다.
명주완(明柱完) 선생님의 이모저모
서울대학병원 A강의실 교단 앞에 서시자마자 계단 의자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휘돌아보신 다음 학생들의 번호를 부르신다.
‘24번’ ‘네’, ‘39번’ ‘네’, ‘13번’ ‘네’ 식으로 교수의 호번(呼番)과 학생의 대답이 교차한다.
필자가 4학년 때 그러니까 1946년 후반기로 기억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전됨에 따라서 일제는 대학예과의 수업연한을 3년에서 2년으로 단축시켰다. 그리하여 학부에서 새 학년이 시작된 것은 4월이 아니라 9월이었다.
해방되던 해 필자들은 3학년이었다. 전기한 호번과 대답은 4학년에 진학한 후 정신과 강의를 받게 되었을 때 명주완(明柱完) 교수께서 학생의 출석을 점검하시던 광경을 소개한 것이다. 1번, 2번……의 순서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번호가 왔다 갔다 해서 본인이 아니고는 대답을 못하게 된다. 소위 대리대답(代理對答) 불가능식의 점검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호번과 대답이 명(明)선생의 강의시간 초에는 으레 되풀이된다. 그러니 학생의 입장에서는 잔꾀를 부릴 수 없게 되고 결석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호번하시는데 한 번도 같은 번호가 중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원래 우리 동기생의 수는 일제 때 80명이었는데 그 중 한국인 학생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해방 후 일본 등지에서 환국(還國)한 학생들이 합쳐져 4학년 때 학생 수는 53명이 되었다. 그러니까 학생번호가 1번에서 53번까지 있었던 셈인데 이 53까지의 숫자를 한 번도 중복시킴이 없이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불러대는 것이니 도저히 범인(凡人)의 소치가 아니다.
사실 필자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숫자에 관한 한 명주완(明柱完) 선생을 따를만한 분을 본 일이 없다. 명(明)선생이야 말로 천재의 자질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신 분임에 틀림없다.
호번(呼番)의 묘(妙)에 놀라서 한참동안 선생님을 우러러 쳐다보고 엄숙해지곤 했던 우리들의 모습이 요사이도 가끔 화제에 오르고 있다.
선생님의 숫자에 대한 기억력은 어디에서나 위력을 발휘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병원(大學病院)의 초대 병원장이셨던 때는 우리들이 학생시절이었던 관계로 어느 정도로 선생님의 숫자가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단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생님께서 서울의대(醫大) 학장(學長)으로 계셨을 때에는 필자 자신이 직접 모시게 되었던 관계로 선생님이 지니셨던 숫자의 위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선생님 밑에서 가장 어려운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회계직원(會計職員)이었다. 장부를 한번 보시면 당장에 잘못된 점을 지적하시곤 했다. 계산기나 주산을 사용하시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자리에서 계산을 해내시니 경탄할 수밖에 없다.
언제였던가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을 때 용기를 내어 암산(暗算)의 비결을 물었더니 뭐 대단할 것이 있겠느냐 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시던 선생님의 동안(童顔)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님의 숫자’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위력을 발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한의학협회장직(大韓醫學協會長職)을 맡고 계셨을 때 필자도 몇 번인가 대의원 총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어떤 종류의 질문이 나와도 능란하게 답변을 하시는데 혀를 찼지만 특히 숫자를 가지고 설명하실 때에는 질문자의 어안이 벙벙하게 되기 일쑤였다. 전자계산기(電子計算機)라는 별칭을 가진 인사가 이 지구에 몇 사람 있다고 듣고는 있지만 필자가 직접 뵈어 온 분으로는 명(明)선생님이 처음이다.
한편 명(明)선생은 무척이나 일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려고 하시지 않았다. 선생님의 부지런함과 기민성(機敏性)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런가 하면 시대감각에도 무던히 예민한 분이셨다. 젊은 사람보다 판단이 앞섰고 동작이 빠르셨다.
서울의대(醫大) 학장(學長)으로 재직 시 많은 업적을 남기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몇 가지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우선 교육과정(敎育課程)의 개편(改編)을 들 수 있다. 근래에 와서 교육과정이 화제에 오르고 관심의 초점으로 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교육과정이 교육기관의 생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는데 막상 교육과정에 손을 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전통적인 이론(理論)과 방법(方法)이란 언제고 뿌리가 깊은 것이어서 이에 도전하는 데에는 정열과 노력, 그리고 최신의 정보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선생님께서 착수하신 첫 사업이 세계 각 대학의 교육과정(敎育課程)을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이러한 일을 하시는데 김인달(金仁達) 교수님이나 벌써 전에 유명을 달리하신 박진영(朴鎭永) 교수님이 남모르는 고생을 하신 것을 선생님께서는 가끔 술회하시곤 했다. 선생님께서 교육과정에 관심을 가지시고 해방 후 처음으로 전면 개편을 단행하신 것은 의학교육(醫學敎育)에 있어서 하나의 금자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근년에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는 교육과정을 20년 전에 거론하시고 개편을 단행하신 선생님이야 말로 의학교육가로서 선각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선생님의 선견지명에 대해서는 재삼 경탄할 따름이다.
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의 창설도 선생님의 많은 업적 중의 하나이다. 예방의학자(豫防醫學者)도 아니고 보건학(保健學)을 전공한 분도 아닌 선생님께서 이 대학원을 창설하신 것 역시 범인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 창설에 따르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지금도 흥분과 고소(苦笑)를 금치 못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서울의대와 ‘미네소타’대학과의 자매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끄시는데 있어서도 선생님께서는 수완(手腕)과 기량(技倆)을 마음껏 발휘하셨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방법의 하나로 선생님께서는 조기회의를 정기적으로 소집하셨는데 추운 겨울에도 예외가 없었다. 미국인 고문교수들도 어지간히 경의(敬意)를 표했다.
선생님께서는 추위에 강하셨다. 제아무리 혹한이 엄습해 와도 런닝셔츠와 팬츠 외의 내의는 착용하시지 않았다.
당시 우리의 형편으론 난방이 제대로 될 수 없었으며 누구나 두꺼운 내의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선생님만은 예외였다.
그런가 하면 여름철에는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몹시 고생을 하셨으며 물수건을 애용하시던 선생님의 집무(執務) 모습이 생생하게 회상된다.
앞서 말한 모임에서 필자는 통역을 담당하였다. 통역이 잘못되면 점잖게 시정해 주시곤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어학능력에 있어서도 비범한 자질을 발휘하신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외국인을 위한 리셉션 같은 데서는 분위기를 바로 잡게 하는 선생님의 농조 섞인 화술(話術)은 어지간히 인기가 있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의 화술이 저세상으로 가신 후에도 빈번하게 화제에 오르고 있는 현상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일을 좋아하시던 선생님은 역대 대한의학협회장(大韓醫學協會長) 중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일선에서 은퇴하신 후에도 일을 놓으려 하시지 않으셨다. 정원 가꾸기에 열중하시는가 하면 한일(韓日)어휘를 비교 연구하시고 그 성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기도 하셨다. 일하는 분이라면 명주완(明柱完) 선생을 연상하게 되고 명주완(明柱完)이란 세 자(字)가 집념의 사나이를 상징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닐 줄로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