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이(李)선생 외에도 또 한분의 이(李)선생이 계셨다. 이 분은 이강우(李絳雨) 선생으로 일본군의 육군중좌였으며 배속장교로 근무하신 분이다. 이강우(李絳雨) 선생은 부인이 일본인 이었으며 부인의 성을 따서 카와모토[河本]라 하였다. 이(李)선생이 언제 일본인 부인과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카와모토 중좌는 특이한 일본어 발음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졸업이 가까운 어느 날 교련시간 중의 일이다. 집총훈련(執銃訓練)을 끝내고 운동장 한구석으로 집합시켰다. 훈화 아닌 훈화가 시작되었다. 경성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 어디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당시는 가회동(嘉會洞)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남산 아래 양지바른 곳이라는 이야기다. 일본 사람들 때문에 쫓겨서 가회동으로 옮겨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분의 해석이 옳은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졸업도 가까워지고 했으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정도는 알고 있어야하며 하나의 비극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부언했다. 후에 어떤 모임에서 이야기를 했더니, 남산(南山)쪽은 구한국시대(舊韓國時代)에 무관(武官)들의 주거지(住居地)로 유명했고 북부(北部)는 문관(文官)의 주거지(住居地)로 유명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카와모토 중좌 즉, 이(李)선생이 어떤 동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알 길이 없는데, 어쨌든 그 당시로는 이와 같은 말을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특히 배속장교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곤란한 일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도 서슴지 않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 일본인 처와 함께 생활하는 일본군 장교이기는 하지만, 한민족(韓民族)의 정기는 살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부터 이분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해방 후에 가책을 받고 사라지셨다는 후문을 들었는데 진위, 사실여부는 알 길이 없다.
또 다른 한국인 선생으로서는 채관석(蔡官錫) 선생, 정형용(鄭亨容) 선생, 김주경(金周經) 선생 등이 떠오른다. 채(蔡)선생은 성대(城大)출신의 영어선생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내가 속했던 학급과는 인연이 없었다. 직접 우리 클래스를 담당하지는 않았으며 다른 분이 휴강 때 두어 번 대신 강의를 해 주셨다. 대단한 실력가라는 평은 듣고 있었는데, 직접 인연을 맺지 못했던 것이 못내 섭섭하다.
정(鄭) 선생 역시 성대(城大)출신으로 기억된다. 한문(漢文)을 담당하셨는데 어딘가에 한국 사람이라는 체취를 풍기고 계셨다. 김주경(金周經) 선생은 대단히 점잖은 화백(畵伯)이셨다. 1학년에 대해서만 도화시간이 있었던 관계로 지도를 받았는데, 1년 동안 이었지만 지금도 예술가다운 그 분의 풍모가 생각난다.
일본인 선생 중에서 생각나는 분도 많다. 실력이 있다고 평가되는 분도 많았는데, 영어의 하세가와[長谷川] 선생, 우에키[植木] 선생, 생물의 야마노우치[山之內] 선생 등이 대표적이다. 하세가와 선생은 독학을 한 분으로서 인도(印度)에 건너가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한 분이었다. 수업시간에는 인도에서 얻은 경험을 섞어가며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다. 지금도 그의 멋있는 영어시간이 생각날 때가 많다. 어원(語源)에서 시작하여 요사이의 생활영어에 이르는 수업내용이 잊히지 않는다.
야마노우치[山之內] 선생의 강의는 일품이었다. 박식한데다가 화술도 좋아서 그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다. 강의뿐만 아니라 실습에 있어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노우치 선생은 명륜동(明倫洞) 자택으로 학생들을 초대하기도 하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노래자랑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허세부리는 선생도 있었다. 영어의 미우라[三浦] 선생이 한 예이다. ABC도 모르는 1학년 첫 영어 시간에 한 10분 동안 영어로 말씀하셨다. 물론, 알아듣는 학생은 없었다. 영어 말씀이 끝난 후 “자네들도 1년만 지나면 내가 지금 말한 만큼 영어를 할 수 있게 되네”하고 자못 점잖게 타이르셨다. 후에 들으니 영어 선생 중에서는 가장 실력이 없는 분이고 발음도 엉망이라는 것이다. 상급학년으로 진급함에 따라서 그의 실력을 알게 되었다.
질이 좋지 않은 선생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다나카[田中]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이분은 경성제대출신의 일본어 선생이었는데, 한국인의 약점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원래 식민지에서 성장한 사람은 한국인의 좋지 못한 점을 많이 알고 있어서 이 점을 악용하는 버릇이 있다. 다나카[田中] 선생은 사사건건 약점을 이용해서 우리들을 골탕 먹이곤 하였다. 약점이 우리들에게는 강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 말이 서투르다고 해서 훌륭한 한국인이 못 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이론이다. 그의 별명이 ‘빈대’였는데, 확실한 진원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의 용모가 빈대 같았고 성미도 빈대같이 괴로움을 많이 준다는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질을 따지면 체조의 토미자와[富澤] 선생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가장 장기간 근속한 분 중의 한분으로 알고 있는데 이분 역시 골탕을 먹이는 습성이 있었다. 훈육(訓育)책임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때로는 인간미를 발휘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외식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호떡집에 가서 호떡을 사먹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불시에 호떡집을 수색하기도 했다. 몇 사람은 꼭 걸려들게 되어 있었다. 기분에 따라서 훈방(訓放)해주는 인간미를 보여 주기도 한 것이다. 때로는 ‘되미’라는 별명에 걸 맞는 행위를 하기도 한 것이다.
토미자와[富澤] 선생과 나와는 개인적으로 다소간의 인연이 있다. 조회 때마다 체조시간이 있었는데, 하루는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갔더니 단상(壇上)에 세우고 양손을 수평으로 뻗어보라고 한다. 토미자와[富澤] 선생은 이 사람의 자세가 불균형의 대표라고 설명했다. 가장 좋지 못한 예로 내가 뽑힌 것이다. 그래도 위로의 말씀을 들은 것이 고맙기만 했다. “권(權)군, 나쁘게 생각 말게. 많은 학생들이 자네 같은데 이왕이면 해서 자네를 표본으로 뽑은 것일세.” 그 후 토미자와[富澤] 선생은 나에게 비교적 자비를 베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