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생시절부터 한심석(韓沁錫) 선생에 대하여 매력을 느꼈다. 모교에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해방 후 내과 부교수로 취임하셨는데 남성다우면서도 수려한 모습이 젊은 학생들에게 색다른 인상을 주었다.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도 한몫을 하였다. 선생의 굳센 의지를 여러 면에서 읽을 수 있었으며 반드시 대성(大成)할 분이라는 예감을 받기도 하였다.
미국 감리교계의 평양 광성고보(光成高普) 출신인 선생은 원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교규(敎規)에 얽매이지 않고 활달한 언동을 하는 차원 높은 교인(敎人)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실제로 선생의 주력(酒力)은 유명하였다. 정력적으로 일하는 데서 오는 피로를 약주로 푸는 선생의 인생철학이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주기도 하였다. 선생의 학문적 실력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였다.
내과의 한심석(韓沁錫), 외과의 민광식(閔洸植)이라고 할 정도로 의학계에서는 정평이 있었다. 두 분이 이미 고인이 되신 지 오래지만 한때 우리 의학계에서 신화적(神話的)인 쌍벽으로 일컬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멋있는 일생을 보내신 분들임에 틀림없다. 두 분의 인생철학(人生哲學)이 비슷하였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한 쌍이 되어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순회 강좌를 하셨던 일은 선망(羨望)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내과과장직을 오랫동안 맡은 후 64년 10월에 서울의대 부속병원장이 되셨는데 이때 남기신 업적이 대단하다. 그 중에서도 서울대병원 신축 건(新築 件)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즉, 혼신의 노력을 하시고 여러 인사들과 접촉한 끝에 결국 병원 신축이 성공한 것이다. 지금의 서울대병원(大病院)이 바로 그것이다.
68년 3월 16일 기공식이 있었다. 문홍주(文鴻柱) 문교부장관, 최문환(崔文煥) 총장, 이제구(李濟九) 학장, 미네소타 대학의 Gault 부학장 등과 더불어 함춘원(含春苑) 일각에서 삽질을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서 생생하게 떠오른다.
70년 4월에 서울대학교 부총장으로 취임하셨다. 나는 선생의 뒤를 이어 의대학장에 취임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하여는 비교적 잘 알고 있다. 당시 서울대학교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현안 과제는 종합화문제였다. 이 일을 위해 서울대 종합화기획위원회(綜合化企劃委員會)가 구성되었는데 부총장이 위원장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게 되는 자리에 의학 출신 인사를 앉힌 것을 생각하면 최문환(崔文煥) 총장의 형안(炯眼)과 한(韓)선생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위원장이 된 한(韓)부총장은 나웅배(羅雄培)(상대, 경영학), 권숙일(權肅一)(문리대, 물리학), 박원희(朴源熺)(공대, 전기공학), 이광호(李光鎬)(의대, 해부학), 정원식(鄭元植)(사대, 교육학), 이홍구(李洪九)(교양과정부, 정치학), 조석준(趙錫俊)(행정대학원, 행정학) 교수를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구미에서 알찬 연구를 한 이분들이 후일 나라 발전을 위해 대단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韓)선생의 선견지명과 판단력에 자연히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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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심석 서울대 총장과 함께 / 옛 의대 함춘원교수회관에서 (1974.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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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 동안 부총장직을 수행하던 선생은 70년 11월 11일, 서울대학교 제11대 총장에 임명되셨다. 전임 최문환(崔文煥) 총장이 공무수행 중에 쓰러져 입원 중에 임기가 끝나자 그 뒤를 이은 것이다. 수개월 간 총장 서리직을 맡았던 관계로 대학의 사정을 상세하게 파악하였던 관계로 대학행정(大學行政)의 일인자로서 십분 실력을 발휘하게 되셨다.
재임 시의 첫 과제는 물론, 종합화계획(綜合化計劃)이었다. 부총장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여 오던 ‘아카데믹 플랜’은 기획위원회가 구성된 후 3개월 만에 성안(成案)되어 1차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그 후 공청회(公聽會)와 각계의 여론(輿論)을 수렴해서 71년 2월 28일에 2차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이 보고서는 대학교 역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며 곳곳에서 한(韓)총장의 피땀 어린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 내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 서울대는 지적 창조력(知的 創造力)과 실천력(實踐力)을 겸비하여 창조 활동을 할 수 있는 지성인(知性人)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2.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문(學問)이 진전되어야 한다.
3. 2개년의 교양과정을 거친 후에 2개년 간 전공과목(專功科目)을 교수한다.
4. 교수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각종 위원회(委員會)를 자율적으로 운영한다.
5. 상호관계 되는 학과(學科)의 교류(交流)가 가능하도록 하고 도서관이나 학생회관 등도 모든 교수나 학생이 접근하기 쉽게 캠퍼스를 설계한다.
한(韓)총장은 74년 8월부터 견비통(肩臂痛)이 심해져서 ‘목디스크’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아카데믹 플랜’이 통과될 때까지 수술을 미루었는데 여기에도 선생의 집념(執念)과 인내심(忍耐心)은 잘 나타나고 있다. 목 깁스를 달고 집무하시던 모습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무던히 서울대학교를 아꼈던 것이 분명하다. 관악 캠퍼스나 서울대학교병원의 신축, 수석졸업생을 위한 청와대(靑瓦臺) 오찬 등은 그 단적인 예이다. 매년 졸업식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서울대학교 내의 단과대학 수석졸업생들을 꼭 청와대에 초청하여 오찬을 베풀었다. 각 대학 학장들도 참석하게 되어있는 관계로 나도 여러 차례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모임은 서울대학교를 위해서 대단히 좋은 기회이며 여러 가지 건의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느낀 것의 하나가 한(韓)총장에 대한 박(朴)대통령의 사랑이 지극하다는 사실이었다. 목 깁스를 하고 있는 한(韓)총장을 위로하는 대통령의 말씀이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한(韓)총장은 서울대 역사상 처음으로 총장직을 연임(連任)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학원사태(學園事態)를 책임지고 물러났지만, 어쨌든 새 기록을 만들었으며 이 기록을 깬 사람은 아직 없다.
